고대-전답, 중세-신앙, 근대-영토
현대엔 계층 질병 범죄표시 이용
사회적 욕구 담는 ‘살아있는 역사’
인간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바위와 나무, 종이, 옷감 등에 세상을 재현한 게 지도다. 인간 역사와 동행한 지도는 시대에 따라 인간이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묘사했는지 보여주는 값진 유산이다. 특히 상징과 기호가 가득한 지도는 저마다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4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과일 채집과 수렵 장소를 그렸고 농경사회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람들은 관개수로를 매개로 전답의 경계를 표시했다.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이자 지리학자인 저자는 지도 제작의 역사를 통해 인류문명의 발자취를 되짚는다.
고대 그리스 지도에는 그들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기원전 546)를 비롯한 그리스인은 대부분 지구를 구형으로 보고 원 모양으로 세계를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는 아폴론이 신탁(여사제를 매개로 전하는 신의 계시)을 내리는 성소이자 그리스 중심에 있었던 마을 델피(Delphi)가 있었다.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지도는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의 주도로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리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나섰던 세계답사 결과로 나온 ‘아그리파 지도’였다.
중세유럽의 세계지도인 ‘마파 문디’는 지도라기보다 신앙고백이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마파 문디는 세상을 원형으로 보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3개의 영역으로 나눈 삼분할 지도였는데, 하느님이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 야벳에게 세상을 나누어 준 것을 상징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전 지도 텍스트를 재료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을 도입하는 실험이 이어졌다. 위도와 경도로 구분해 지도를 만든 최초의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85?∼165?)의 대표작 ‘지리학 안내’는 수많은 학자들이 새롭게 편집했다. 당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나온 출판물이 지도였다.
근대는 지도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왜곡되는지를 보여준 시기였다. 17,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미대륙 식민지 쟁탈전이 대표적이다. 1656년 프랑스 루이 13세의 지리학자 상송은 프랑스가 차지한 북미 내륙은 확대하고 영국이 차지한 북미 동부해안선은 축소한 ‘왜곡지도’를 만들었고 1718년엔 ‘국왕 직속 수석 지리학자’ 드릴이 또 다른 버전의 ‘왜곡지도’를 내놨다. 영국은 1720년 지리학자 몰, 1733년 앤 여왕의 회계사였던 포플이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북미지역을 왜곡한 지도를 만들며 반격에 나섰다.
지도는 미합중국 성립에 이용되기도 했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온 지리학자 캐리가 1795, 1796년 만든 미국 지도첩이 그 예다. 저자는 각 주의 지도를 그린 뒤 하나의 책으로 묶어낸 캐리의 지도첩을 각 주 간의 정치적 통일성을 부여한 상징물이라고 평가했다.
19세기를 거치며 등장한 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주제로 만든 지도였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면서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사회의 계층지도를 시작으로 지역 간 빈부와 계층 격차를 표시하는 지도가 잇따랐다. 콜레라가 세계적인 문제였던 1855년 런던의 의사 스노는 서로 다른 회사의 식수를 공급받는 런던 두 지역의 콜레라 발생 분포를 그린 지도를 만들었다. 1829년 프랑스 학자들은 프랑스 각 지방의 범죄발생 빈도를 교육수준과의 관계에서 조명한 범죄 지도를 그렸다.
이 책은 웅대한 관점에서 세계를 조망하며 세계의 중심을 중동지역으로 보는 옛 이슬람의 지도 제작 전통과 선교사 마테오 리치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중국, 백제에서 건너온 승려 교키(行基·670∼749)의 가르침으로 지도 제작 기술을 발전시킨 일본, 풍수지리에 입각한 형세도에 탁월했던 한국의 지도 역사도 소개한다. 저자는 “지도 제작의 역사는 곧 예술 표현, 기술의 진보, 그리고 정치·경제적 판도가 남긴 족적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사회적 산물로서, 그 유구한 변화를 총체적으로 들려주는 살아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