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국내 개봉하는 영화 ‘블러드’(감독 크리스 나흔)에 홍보 회사가 붙인 설명이다. “미국 자본이 참여하지 않았는데 할리우드라는 말을 쓸 수 있냐”는 지적에 한국 홍보를 맡은 렘택커뮤니케이션즈 측은 “소니픽쳐스가 대행해 미국 시장에 개봉할 계획이다. 넓게 보면 ‘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할리우드 진출과 미국 진출을 동일시하는 시각에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가 어느 곳에든지 해외로 나간다면 차라리 말리고 싶다. 한국의 CF스타 전지현을 외국 시장에 이리도 볼썽사납게 내놓아야 할까 싶을 정도로 ‘블러드’가 졸작이기 때문이다.
‘블러드’의 주인공 사야(전지현)는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뱀파이어 사냥꾼이다. 이 설정은 미국 영화 ‘블레이드’로 이미 낯익은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복잡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팸플릿 설명을 읽지 않고는 뒤죽박죽 줄거리를 따라잡기 어렵다. 인물들이 우정을 맺거나 다툼을 벌이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어 당황스러워지기 일쑤다.
컴퓨터그래픽은 엉성하게 만들어져 10여 년 전 한국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보여줬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전투 장면에서 뱀파이어들의 목이 끊기고 배가 갈리고 팔다리가 찢겨져나갈 때마다 ‘전혀 사실감 없는 선혈 그래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블러드’는 홍콩의 영화제작사인 에드코가 현지와 일본 프랑스 등에서 자본을 모아 500억 원을 들여 찍은 영화다. 5월 29일 일본에서 개봉했으며 싱가포르 대만 태국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에서도 6월 중 개봉할 예정이다. 렘택커뮤니케이션즈 측은 “한국 배우가 단독 주연한 영화를 세계 시장에서 이렇게 큰 규모로 공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블러드’는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원작인 일본 만화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무시한 어색한 B급 영화라는 혹평도 쏟아졌다.
전지현은 2001년 ‘엽기적인 그녀’ 외에는 흥행작이 없는 배우다. 그 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데이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에 출연했지만 연기력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4일 시사회를 가진 ‘블러드’의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생모(生母)를 죽여야 하는 숙명적 고뇌를 연기했으나 역부족으로 보였다.
‘어떻게든 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대단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1997년 박중훈의 ‘아메리칸 드래곤’ 이후 정지훈의 ‘스피드 레이서’, 박준형의 ‘드래곤볼 에볼루션’ 등 한국 배우의 할리우드 진출작은 모두 호평을 받지 못했다. 이유에 대한 지적은 여러 가지다. ‘블러드’의 전지현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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