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2>

  • 입력 2009년 6월 10일 13시 48분


최초로 손바닥을 뒤집기가 어렵지, 한 번 뒤집힌 손바닥을 또 뒤집는 일은 쉽다. 처음 의심하기가 어렵지, 한 번 의심을 시작한 후에 계속 의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앨리스는 초록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병식에게 따졌다.

"아, 아니 지 선배! 뭡니까 지금? 땡큐라니요? 저 녀석들한테 붙잡혔던 거 아닙니까?"

"쯧쯧, 고객에게 붙잡히는 법도 있나?"

"고객이라뇨? 저 패거리가 선배 고객이라는 겁니까?"

"이 방으로 오기 전에 확인했더니, 은 검사는 아직 20층에 그대로 있더군. 내가 30분만 더 수색 시간을 달라 했어.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 옛정을 생각해서 5분 줄게."

앨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고객이라는 게 뭔 소립니까?"

"아, 그거! 내가 아르바이트를 좀 했지. 간단한 물품을 팔았어. 저 녀석들은 단골이고."

녀석들이 키들거렸다. 앨리스는 석범이 창수와 병식을 감시하라면서 들려줬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혹시 선배가 판 물품이…… 헤드셋입니까? 변주민 선수도 선배 고객이었습니까?"

"제법인 걸. 맞아. 변주민 그 친군 단골 중에 단골이지. 고통을 잊고 무료함을 지우는 덴 아이-스피드만한 게 없거든. 3년 꼬박 업그레이드를 시켜줬지. 헌데 하필 내가 판 헤드셋을 쓰고 죽어 있지 뭐야. 그래서 슬쩍 했지."

"……설마 성 선배도?"

병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질문만큼은 피하고 싶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은 듯 입을 열었다.

"실수였어.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창수가 문종과 이 녀석들을 보지만 않았어도, 무모하게 뒤따라가지만 않았어도, 또 내 씀씀이를 의심해서 뒷조사만 하지 않았어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거야. 하지만 친구를 믿지 못하고 먼저 의심을 품었으니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 그래도 단번에 고통 없이 끝냈어."

"성 선배의 뇌를 끄집어낸 건 스티머스가 두려웠기 때문이군요. 우리가 성 선배의 단기기억을 영상으로 옮기면, 거기에 지 선배가 나올 테니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라고 믿었는데, 어떻게 선배가 성 선배를 죽일 수 있습니까?"

"창수가 날 의심하지 않았으면, 나도 창술 죽이진 않았을 거라니까!"

병식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지팡이를 든 사내가 뚱보를 데리고 앨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싸울 자세를 취하자, 병식이 앨리스의 총을 들어 조준했다.

"가만히 있어. 곱게 아프지 않게 끝낼게."

보안청 특별수사대 형사들이 지닌 총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개소리!"

앨리스가 욕을 뱉는 순간, 병식이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앨리스의 오른 무릎이 꺾였다. 총알이 정확하게 그녀의 기계 무릎을 부순 것이다. 지팡이가 쭉쭉 뻗어 나와서 앨리스의 왼 무릎마저 후려쳤고, 엉덩방아를 찧은 앨리스의 어깨에 뚱보가 핀 주사를 놓았다.

"성 선배처럼……."

앨리스는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지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병식이 쪼그리고 앉아서 앨리스의 앞이마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그리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푹 자. 약속해.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그냥 두고 뇌만 끄집어낼게. 그래야 장례 식 때 고운 얼굴 한 번 더 보지. 아, 어떻게 빌딩을 빠져나갈 거냐고? 걱정 마. 간단한 일이니까. 널 죽인 사람은 방문종이 될 거야. 네 총을 빼앗아 방아쇠를 당긴 거지. 이 친구들은 29층에 사무실 하나를 빌려 쓰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 이래 뵈도 촉망받는 디지털 퍼포머들이거든. 난 이쪽 어깨에도 총구멍을 하나 더 낼 생각이야. 문종한테 당한 거지. 물론 문종이 썼던 헤드셋은 사라질 테고 문종의 뇌도 깨끗이 비워질 거야. 미안하지만 녀석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야겠어. 물론 내가 쏜 거고, 난 정당방위니까 처벌 받을 일 없고."

두피를 벗겨내기 위해 수술용 칼을 쥔 병식이 앨리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가, 남 형사!"

칼끝을 앨리스의 머리에 갖다 댄 병식이 갑자기 꼬꾸라졌다. 녀석들의 놀란 눈이 병식을 쳐다본 후 다시 총알이 날아온 문으로 향했다. 굳게 잠긴 문에 작은 총구멍이 뚜렷했다. 녀석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문이 부셔졌고, 한 사내가 날렵하게 강철구두를 휘돌리며 뛰어 들어왔다. 은석범 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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