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형산 운동을 끔찍이도 싫어했지?"
앨리스가 석범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해마다 치르는 체력 측정도 턱걸이로 겨우겨우 통과했습니다."
"저 달링 4호를 포박한 줄 말이야. 줄넘기 줄 같은데……."
앨리스가 급히 달링 4호에게 다시 가서 줄을 풀었다. 나무 손잡이까지 가지런한 틀림없는 줄넘기 줄이다. 앨리스가 손잡이를 쥐다가 뭔가 의심쩍은 듯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폈다.
"A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변주민이라면, B나 JM일 텐데……. 아, 변주민의 별명이 '알람'이었죠. '알람'의 A! 이게 변주민의 물건이라면, 변 선수와 지 선배는 진작부터 알던 사이겠군요. 하지만 A로 시작하는 이름이나 단어는 얼마든지 있으니 속단은 금물입니다."
"거기만 A가 새겨졌다면 속단이지만, 또 다른 물건에도 같은 이니셜이 있다면, 변주민과의 연관성은 한층 높아지겠지? 줄넘기 줄은 가르쳐줬으니, 나머지 하난 남 형사가 찾아봐."
"알겠습니다. 재촉하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앨리스가 고개를 돌려 벽걸이를 쳐다보는 순간, 나란히 걸린 헤드셋 두 개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지 선밴 음악이라면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습니다. 음식점에서 잔잔히 흐르는 경음악도 꺼달라고 요구할 정도였죠. 헤드셋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그것도 벽걸이에 곱게 걸려 있다니……."
앨리스가 헤드셋을 꺼내 살폈다.
"역시 같은 회사 제품이군요. 이건 이니셜이 JBS입니다. 지병식. 지 선배 헤드셋이 분명하고, 아, 저건 정말 A인데요."
"좀도둑은 지 형사였어. 변주민 살해 현장에서 헤드셋을 슬쩍한 장본인이지."
앨리스가 말꼬리를 잡아챘다.
"앞뒤가 맞질 않습니다. 지 선배는 이미 헤드셋이 있지 않습니까? 근데 왜 변 선수 것을 슬쩍 합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 들어보면 알겠지. 이리 줘봐."
석범이 이니셜 A가 박힌 헤드셋을 앨리스에게 받아 썼다. 앨리스도 남은 헤드셋을 쓰려고 했지만 석범이 막았다.
"남 형사! 번갈아 쓰자고. 둘 다 한꺼번에 실험에 응하는 건 위험한 일이야."
"검사님! 그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석범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뇌파 작곡에 익숙한 사람이 하는 게 좋아. 남 형산 아직 뇌파 작곡이 뭔 지도 모르잖아?"
"그치만……."
"안전성만 확인되면 곧 기회를 줄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무슨 음악을 틀까요?"
"아무거나! 남 형사 애창곡으로 하나 부탁해."
"알겠습니다. '다윈과 핀치들'의 '아무도 갈라파코스로 가라하지 않았네.'를 틀겠습니다."
앨리스가 파워스마트수첩에서 오디오 기능을 켠 후 헤드셋에 연결시켰다. 석범은 눈을 지그시 감고 까마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잔잔한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밀려갔고, 그 위로 새떼들의 날갯짓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아기들 울음이 그 위에 얹히고 엄마들 웃음도 뒤섞였다.
행복한 나날이군.
석범은 입 꼬리를 올리며 함께 웃었다.
쿠앙!
대포 소리가 뒤통수를 쳤다.
웅얼웅얼 자글자글 수군대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작은 웅얼거림이 신경을 계속 자극했다. 실뱀들이 사방으로 기어 다니면서 작은 송곳니로 숨구멍을 찌르는 듯했다. 석범이 외쳤다.
"더 크게, 더 빨리!"
쿠앙쿠앙쿠앙, 대포가 발사되는 만큼 웅얼거림이 잦아들었다. 석범은 그 웅얼거림을 떼어내기 위해 몸을 흔들어댔다. 신기하게도 손과 발과 어깨와 머리를 떨 때마다 웅얼거림이 툭툭 바닥에 떨어져 스러졌다. 쿠앙쿵쿠앙, 그 사이에도 대포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웅얼거림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번에는 '쿠앙'대는 대포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실뱀이 아니라 거대한 악어들이 팔과 다리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 고통을 넘어서서 더 지독한 쾌락에 닿으리.
"크게! 천둥을 울려. 천둥! 어서 천둥!"
그 순간 앨리스가 석범의 귀를 덮었던 헤드셋을 떼어냈다. 석범은 곧 쓰러져 20분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악어가 실뱀으로 바뀌고 다시 없음으로 돌아오기까지. 흥분한 뇌의 활동전위 분포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