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궁궐 방에서 부채로 얼굴을 가린 궁녀가 눈물을 쏟고 있다. 눈물은 나비로 변해 팔랑거리더니 어느새 꽃송이로 바뀌어 꽃비처럼 떨어진다. 흑백 배경에 화사한 한복을 입은 궁녀의 눈은 007 시리즈에 출연한 여배우의 눈이다.
사진과 퍼포먼스, 비디오와 조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부지런히 활동해온 작가 이상현 씨(54)의 비디오아트 ‘낙화의 눈물’이다.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선 컨템퍼러리 갤러리(02-720-5789)에서 선보이는 ‘삼천궁녀’ 시리즈 중 하나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 의도적 부조화를 드러내는 작품을 보면서 관객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관계없이 되풀이되는 ‘인간의 욕망과 무상함’.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는 옛날 흑백사진을 배경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조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8월 22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02-598-6247)에서 열리는 ‘미술시네마-감각의 몽타주’전 역시 시공간을 분해하고 조립, 합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강영민 권여현 김강박 김아영 노재운 난다 박준범 서동욱 안정주 양연화 오용석 씨 등 22명은 미술과 영화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회화 사진 설치 영상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영화 속 ‘몽타주’ 기법처럼 서로 상충되는 요소를 충돌시키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일제강점기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됐던 오래된 공간, 그 안에 전시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업이 영화적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며 관객을 미지의 세계로 초대한다.
○ 과거에서 오늘을 읽다
조선총독부 옥상에서 찍은 경복궁 근정전 주변에 복숭아꽃이 피어 있고 디지털 아바타로 만든 250명 궁녀들이 춤을 춘다(삼천궁녀). 또 다른 궁녀들은 연꽃을 타며 놀고 작가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연지유희). 근정문을 뒤에 두고 춤추는 궁녀들과 로켓을 짊어진 작가의 모습도 보인다(대한제국 로켓발사).
‘삼천궁녀’ 시리즈는 삼천궁녀가 춤추던 무릉도원도 다 덧없는 꿈에 불과하며, 이 땅을 둘러싼 상황도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작가는 조선총독부 아카이브의 흑백사진을 토대로 인터넷과 게임에 떠도는 이미지를 결합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 지나간 역사와 오늘이 교직된 작업은 ‘코믹한 아이러니’와 ‘비극의 무대’ 사이에 머물면서 개인과 역사의 맥락을 이어준다. “아무리 큰 역사적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득한 잔영만이 남는다”고 말하는 작가는 흘러간 역사를 통해 지금을 돌아보려 한다. “그가 끊임없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수행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오직 지금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이들에게 위안의 제스처를 보내기 위해서다.”(미술평론가 박만우)
○ 오늘에서 미래를 엿보다
‘감각의 몽타주’전은 몽타주의 방식으로 구성된다. 11개의 방을 ‘타인의 기억’ ‘가상의 세계’ ‘뉴스의 재구성’ 등 서로 다른 주제로 합성해 우리를 둘러싼 현란한 이미지의 홍수를 새로운 방식으로 일깨운다.
각 방마다 합성된 시, 공간의 이미지로 현대미술의 다양한 층위를 경험하게 한다. 가상의 메트로폴리스를 재현한 유비호, 책 제목이나 일상용품의 상표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구성한 오재우, 영화와 현실이 엇갈리며 드라마 세트 같은 허구적 풍경을 선보인 오용석, 초현실과 객관이 만나는 수술실을 통해 환각과 이성 사이를 파고든 박지은, 테트리스 게임을 활용해 분열되고 재결합하는 몸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표현한 신미리 씨 등.
대부분 작품은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게 뒤섞거나 뒤바꾸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헷갈리게 한다. 우리가 몸담은 세상의 불안정함과 모호함을 유쾌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깨우쳐주기 위해서다. 두 전시에서 만나는 혼성의 세계. 그 안에 뒤죽박죽 우리네 현실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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