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학로에선 피의 복수를 토대로 연극과 삶의 관계를 다룬 두 편의 연극을 만날 수 있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02-889-3561)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실험극단의 ‘고곤의 선물’과 대학로예술극장(02-708-5001) 대극장 무대에 오른 극단 우인의 ‘이(爾)’. 전자는 ‘에쿠우스’ ‘아마데우스’로 알려진 영국 희곡작가 피터 셰퍼의 서양연극에 대한 묵시론적 통찰이 담긴 작품이다. 후자는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으로 전통 연희와 정치권력의 함수 관계를 풀어낸 작품이다. 서양연극과 한국연희란 전혀 다른 전통 속에서 연극과 삶의 상호 관계를 포착한 두 작품의 접점을 3개의 키워드로 풀어본다. ‘고곤의 선물’은 21일까지, ‘이’는 7월 8일까지 공연한다.
○ 복수는 나의 것
‘고곤의 선물’은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천재 극작가 에드워드 담슨(정동환)의 극단적 예술관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게 연극은 현실에서 억압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란 피의 복수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죽인 클라이템네스트라는 그런 정의의 화신이다. 딸(이피게네이아)을 제물로 희생시킨 것에 대해 피의 복수를 실천함으로써 타락한 세상을 정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에서 연산(김내하)도 어미를 죽인 신하들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한다. 연산은 어미의 제단 앞에서 복수의 완결을 선언하며 어미의 피 묻은 속적삼을 태우는 제의로 원혼을 달랜다. 이는 복수를 신성시하는 담슨의 연극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연산은 해방감을 느끼기보다 지독한 허무감에 빠져든다.
○ 나선회로의 극중극
‘고곤의 선물’에는 담슨의 예술철학이 담긴 3편의 연극이 등장한다. 8세기 동로마제국의 성상파괴운동을 극화한 ‘성상들’, 17세기 아일랜드인 학살과 종교예술품 파괴를 주도한 크롬웰에 대한 단죄를 그린 ‘특권들’ 그리고 1987년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테러를 응징하는 ‘아일랜드’다. 담슨은 이들 작품에서 예술파괴, 학살, 테러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수위를 높여 가다 결국 자멸의 늪에 빠진다.
‘이’에서도 연산의 총애를 받는 광대 공길(정원영)이 이끄는 광대들의 풍자극인 소학지희(笑謔之戱) 3편이 펼쳐진다. 첫째는 연산의 여인 장녹수(진경)와 결탁한 형조판서의 비리를 풍자한 광대끼리의 놀이다. 둘째는 공길의 의도적 연출 아래 형판의 개인비리만 폭로한 궁중연희다. 셋째는 공길이 장녹수뿐 아니라 연산까지 직접 비판하고 나서는 궁중연희다. 이에 연산은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나를 버리느냐”고 묻고 공길은 “내가 마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버린 것”이라 답한다.
○ ‘연극 ≥ 현실’의 위험한 게임
‘고곤의 선물’에서 고곤은 바라본 사람을 돌로 바꾼다는 그리스신화 속 괴물 고르곤을 말한다. 메두사로 대표되는 고르곤의 목을 베면 두 종류의 피가 흐른다. 죽음을 부르는 피와 치유의 힘을 지닌 피다. 연극에도 이들 피가 함께 흐른다. 곧 타락한 현실에서 짓밟힌 정의를 회복하려는 복수의 피와 그런 현실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구원하는 치유의 피다. 담슨이 복수의 피에만 집착함으로써 치유의 피를 고갈시켰다면 공길은 연산에 대한 치유의 피만 고집하다 광대의 생명인 풍자정신마저 거세됐음을 깨닫는다.
한편 담슨이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현실을 일치시키려다 파멸에 이른다면 연산은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한판 연희처럼 살려다 파멸한다. 예술과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열정이 자기 파괴적이라면 예술이 현실을 집어삼키는 가치전도는 정신분열적이다. 닮은 듯 또 다른 두 연극의 또 다른 일깨움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