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막으려 물길 돌려…일제때까지 4차례 개축
왕이 건너던 종묘전교와 시전행랑 터도 함께 확인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앞에서 피맛길(골) 옆을 유유히 흘렀던 조선시대 인공하천인 회동·제생동천의 흔적과 15∼20세기 시대별 제방 일부가 발견됐다. 왕이 종묘에 행차할 때 건넜던 회동·제생동천 다리인 종묘전교(宗廟前橋)의 돌 부재(건축물 뼈대를 이루는 재료)들도 나왔다.
수해를 막기 위해 종묘 앞으로 물길을 돌렸던 조선시대 인공하천이 발굴 조사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회동·제생동천은 조선왕조실록과 고지도로만 존재가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16일 서울역사박물관의 발굴조사 현장(종묘 앞 종묘광장)을 찾아 이를 확인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날 발굴 성과를 전문가들에게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회동·제생동천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가회동 인근인 북촌 가회방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 청계천과 합류했지만 홍수에 따른 민가 피해를 막기 위해 세종 대에 종묘 앞으로 인공제방을 만들어 동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회동·제생동천은 도시화 과정에서 매립돼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시위 장소나 노인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종묘광장 땅 밑에도 조선의 역사는 살아 숨쉬고 있었다. 지하 3m와 2.3m 지점에서 두 차례 조성된 회동·제생동천 초기(15∼16세기) 제방 시설이 나왔다. 나무 말뚝으로 물막이 구조를 만들고 흙과 유기물을 채웠다. 지하 1.9m의 17∼18세기 제방은 돌로 만들었다. 19세기의 석축 제방(지하 1.5m)과 일제강점기에 만든 돌 제방(지하 1.2m)도 차례로 나와 인공하천의 시대별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회동·제생동천과 나란히 한 길이 피맛길(서민들이 고관들을 피해 다니던 길에서 유래)이었다. 나무 말뚝에서 석축으로의 제방 변화는 종묘 앞 피맛길 형성 시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신영문 학예연구사는 “17∼18세기 피맛길에 서민들의 발길이 늘면서 제방의 안전성을 위해 돌 제방으로 바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묘 앞 회동·제생동천 다리인 종묘전교의 위치도 확인됐다. 이곳에서 교각과 상판석 등 각종 부재가 발견돼 종묘전교의 복원이 가능해졌다. 교각 높이로 볼 때 회동·제생동천이 깊이는 평균 1.6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천 폭은 조성 당시 4.5m였을 것으로 보인다.
회동·제생동천과 피맛길 너머로는(도로 쪽) 시전행랑 터가 발견됐다. 시전행랑은 조선시대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한 상설시장의 점포 건물이다. 정면 2칸(7.9m), 측면 1칸(3.4m)의 온전한 시전행랑 터 1채를 비롯해 행랑 터 3채에서 온돌, 마루, 창고가 확인됐다.
이로써 조선시대 서민의 애환이 담긴 종로거리의 풍경을 재현할 수 있게 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재구성한 광경은 이렇다. 종묘 앞에 민가들이 밀집했으며 그 앞으로 마실 물을 찾고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회동·제생동천이 흘렀다. 하천 옆 피맛길에는 양반을 피해 걸음을 재촉하는 서민들이 오갔고, 시전행랑 상인들의 시끌벅적한 호객이 벌어졌다. 종묘에 행차한 왕이 종묘전교를 건널 때면 서민들은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바닥에 엎드렸을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