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토대인 고전 번역비율은 이제 22%에 불과합니다. 이 추세라면 남은 고전을 한 차례 번역하는 데만 100년 이상 걸립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조선시대 왕명 출납기록), 일성록(영조∼순종 정사 기록) 등 한문 고전의 번역은 1965년 민간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창립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3년 조선왕조실록 완간 등의 성과가 나오고 민족문화추진회가 2007년 11월 국가연구기관인 고전번역원으로 개편됐지만 국가 차원의 고전번역체계는 이제 시작단계라는 게 학계의 평가다. 18일 오후 3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원장 신승운)이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연 ‘한국고전번역사업 활성화 방안 공청회’는 고전 번역 44년의 현황을 분석하고 국가적인 고전번역체계를 갖추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동문화연구원 연구팀이 올 2월 교육과학기술부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고전번역사업 추진의 효율화 및 성과활용 극대화 방안 기획연구’라는 정책보고서는 고전 번역의 현 수준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번역 대상인 7964책 중 번역된 책은 22%(1765책)에 불과했다. 국고문헌의 경우 447책인 조선왕조실록만 완역돼 있다. 조선왕조실록보다 훨씬 풍부한 자료를 담은 보고(寶庫)로 불리는 승정원일기는 1813책 중 277책(15%), 516책인 일성록은 110책(21%), 180책인 비변사등록은 30책(17%)만 번역돼 있어 국고문헌 3324책 중 번역된 책은 878책뿐이다. 유학자의 문집 등 일반고전의 경우에도 번역대상인 4640책 중 887책만 번역됐다. 연간 60여 책(원고지 12만 장) 수준인 현재의 번역량으로 계산하면 남은 책들을 번역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린다.
연구팀은 보고서에서 고전 번역비율을 높이기 위해 중앙과 지역의 역할분담을 제안했다. 연평균 국고문헌 30책과 일반고전 20책 수준의 번역을 하는 고전번역원이 국고문헌 번역에 주력하면 60책 수준으로 번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고, 향토색이 짙은 일반고전의 경우 관련된 지역의 주요 연구소를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거점연구소로 육성하면 100책 수준의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구팀을 이끈 신승운 교수(문헌정보학)는 “중앙의 국가연구기관과 지역 연구기관의 협력으로 학계에서 세대 변화의 기준인 30년 내에 남은 고전을 한 차례 번역하자는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국무원 산하에 고문헌 정리기관인 ‘고적소조(古籍小組)’를 두고 각 지역 대학마다 지역별 고전을 번역하는 기관을 두는 중국의 체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날 공청회에 토론자로 나온 김성기 충북대 우암연구소장은 “지역별 거점연구소를 통해 부족한 전문 인력을 100%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 공감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문 인력을 키워내는 계획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종범 조선대 교수(사학)는 “국문학과 한문학, 역사와 철학은 모두 고전을 매개로 만난다”며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공청회에서 제기된 방안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국가번역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