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도시에 관한 이야기다. 이 도시의 누가 인사이더이며, 누가 아웃사이더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온전한 소속감과 충족감을 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란 공간은 자잘한 사건 사고와 지루한 일상으로 뒤범벅돼 있다. 소설가 강영숙 씨의 신작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는 이런 도시살이의 면면을 클로즈업해준다. 작가는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우화적이지도 않은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암담하고 우울한 세계를 은근한 유머를 통해 형상화해냈다. 때로는 대책 없어 한숨이 나오지만 가만히 보면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낡은 빌라의 거주자들을 다룬 ‘갈색 눈물방울’이란 작품은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주변 모든 지역이 재개발됐음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낡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빌라에는 어머니의 죽음과 실연이란 고통을 한꺼번에 맞닥뜨리게 된 주인공과 정체가 불분명한 동남아인 세 명, 빌라의 관리인 격으로 거주하는 까탈스러운 노부부가 살고 있다.
동네사람들은 매일 쓰레기를 뒤지고 다니는 동남아인들을 ‘저기 빌라에 사는 것들’이라고 부르고, 노부부는 그들을 ‘이 층에 사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주인공은 동남아인을 비롯해 노부부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사실은 노부부를 비롯해 주인공 역시 ‘저기 빌라에 사는 것들’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빌라의 상황은 주인공이 수강하는 영어회화 수업과 겹쳐지며 대비를 이룬다. 꽃미남 호주 강사 앞에만 서면 쑥스럽고 부끄러워 벙어리가 되는 주인공에게 한 수강생이 쏘아붙인다. “빨리하세요. 왜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만들죠? 난 참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럴 거면 뭐 하러 학원에 와요?”
사실은 안 되는 영어를 힘겹게 입에서 떼야 할 때, 수강생 모두가 그 작은 조직 안에서 이방인이자 소외계층이 된다. 이런 질책은 동남아인들이 피부색과 국적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범죄사건의 용의자로까지 오인 받게 되는 사건과 맥이 닿는다. 주인공은 동남아인 이웃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형성한 뒤부터 옹알옹알 맴돌기만 하던 영어를 유창하게 말한다. “내 친구는 스리랑카에 살아요. 스리랑카는 아름다운 곳이래요. 내 친구가 그날 밤 나에게 말했어요….” 소외된 사람들 간의 연대가 빚어내는 작은 기적들은 따뜻한 감동을 준다.
‘안토니오 신부님’은 흥에 겨운 대로, 내키는 대로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위치와 입지를 조금씩 고립시켜 가는 대책 없는 도시 여인에 관한 이야기. 갓 취업한 뒤 유부남 부장과 연애하다 회사를 관두고, 외국어학원에서 우연히 만난 국적이 불분명한 (체코인이었다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가 터키인, 러시아인도 되는 돈 없는 미남) 외국인 줄리앙과 동거하느라 잘 다니던 회사를 또 관둔다. 닥치는 대로 사고를 저지르는 여자에게 오랜 친구이자 순수한 우정과 선의의 상징인 안토니오 신부님이 있다. 결정적인 일이 생길 때마다 여자와 그 가족들을 도와주고 다독여줬던 안토니오 신부는 여자가 마침내 일상의 무료함과 안온함에 적응해 갈 즈음, 선교차 갔던 중국에서 사고를 당해 실종되고 만다.
‘령’ ‘천변에 눕다’ 등에도 갈지(之)자를 그리며 갈팡질팡하는 이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가스료 낼 돈도 없고, 가스료 연체 독촉장을 들고 온 우편배달부에게 대접할 커피믹스 한 통이 없는 독신녀, 천변의 허름한 집에서 ‘토탈 미용센터’를 차리고 불법 미용시술로 돈을 벌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는 사뭇 다르면서도 엇비슷하다. 그들의 고독을 달래주는 것은 때론 옆집에 사는 할머니, 때론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이들이다.
작가는 도시의 후미진 구석구석을 비추면서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의 작은 연대를 그려낸다. 거창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은 소심한 화해와 연합이 삭막한 도시를 떠받치는 힘임을, 그렇기에 모든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때때로 웃을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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