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최치원 ‘둔세시’)
신라 헌강왕 때의 학자 최치원은 뛰어난 문인으로 당나라 유학도 다녀왔으나 조정 관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지방으로 내려간다. 그가 만년에 머물던 곳이 가야산 홍류동 계곡이다. 이곳에는 솔숲에 ‘산을 둘러싸다’라는 뜻의 농산정(籠山亭·경남 합천군 가야면)이 있다. 속세의 시비 소리를 물소리로 덮어 없애고 싶다는 심정을 표현한 ‘둔세시(遁世詩)’의 마지막 구절(故敎流水盡籠山)에서 정자의 이름을 따왔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요수정(樂水亭)의 정자 중건기에는 ‘산수 사이에 정자 지으니/물을 사랑함이고 산을 끼치지 않았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나니’(知者樂水 仁者樂山)라는 구절에서 정자 이름을 따온 것이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청암정(靑巖亭)은 풍치 좋은 심산유곡 대신 주변에 논밭이 널려 있는 평범한 길가에 있다. 이곳에 정자가 있는 이유는 얕은 연못 속 거대한 바위 때문이다. 청암정은 이 바위 위에 건립됐다. 선비들은 갖은 풍상을 겪은 암석에서 인간의 불완전성과 변절을 초월한 힘을 발견했다. 바위에 대한 선비들의 애정이 청암정에 담겨 있다.
창덕궁에만 13군데에 정자가 있을 만큼 궁궐에도 정자가 많았다. 역대 어느 왕보다 창덕궁 후원을 자주 찾았던 정조에게 정자는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공묵(恭默·공손하고 조용함)의 정사를 되돌아보는 곳이었다. 창덕궁 존덕정(尊德亭) 정자시에는 ‘뭇 백성들 한결같이 태평성대로 나아가게 하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임금의 선정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와서 궁궐 후원에 신하와 백성이 모여 즐겁게 노니는 모습을 노래했다.
호연정(浩然亭·경남 합천군 율곡면)의 기둥 굵기는 제각각이고 서까래의 모양도 일정하지 않다. 산에서 제멋대로 자라 굽거나 휜 나무를 그대로 건축 부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죽서루(강원 삼척시 성내동)에는 기단과 초석이 없다. 울퉁불퉁한 바위 모양 그대로 기둥을 깎아 자연 암반 위에 직접 정자를 세웠다. 자연에서 배우고자 했던 만큼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을 긍정했던 것이다.
저자는 “정자는 건물이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생명력이 유지된다”고 강조한다. 최근 스테인리스 기둥을 세우고 흰색 밧줄을 연결한 돌다리가 정자 근처에 들어서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거나, 건물만 훼손하지 않으면 만족하는 식의 보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한다. 그는 “(정자문화를 보전하는 일이) 자연과 환경보전의 문제, 나아가 현대인의 정신 건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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