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더워 마시고 추워 마시고… 너 없인 詩도 무슨 맛

  • 입력 2009년 6월 20일 02시 59분


18세기 후반 화가 김후신이 그린 대쾌도(大快圖)의 일부분. 만취해 갓을 잃어버린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한 사람을 세 사람이 부축해 끌고 가고 있다. 취기에 흥이 오른 듯 만취한 이의표정이 재미있다. 그림 제공 선
18세기 후반 화가 김후신이 그린 대쾌도(大快圖)의 일부분. 만취해 갓을 잃어버린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한 사람을 세 사람이 부축해 끌고 가고 있다. 취기에 흥이 오른 듯 만취한 이의표정이 재미있다. 그림 제공 선
◇술-한국의 술 문화 1, 2/이상희 지음/1권 956쪽 9만 원, 2권 778쪽 8만 원·선

1987년 내무부, 1990년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이상희 전 장관(77)은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한다. 이 전 장관은 19일 통화에서 “맥주 한 병을 마시면 과하다고 느낄 정도”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가 술 문화에 관한 책을 펴냈다. 1200여 점의 그림을 곁들인 200자 원고지 1만여 장 분량의 책이다. 자료 조사에 10년, 책 쓰는 데만 3년이 걸렸다. 그는 “선비들의 생활사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으다 보니 선비들의 생활에 늘 술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면서 “와인 같은 서양 술에 대한 책은 많은데 우리 술에 대한 책은 별로 없어서 우리의 술 문화를 제대로 짚어 보자는 생각에 책을 썼다”고 말했다.

술의 어원, 술집의 변천, 술과 민속, 음주와 문학 등을 살핀 이 책은 ‘한국 술 문화를 다룬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우선 술의 어원을 ‘수블’ 또는 ‘수불’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ㅂ’이 사라졌고 수불은 수ㅱ, 수을, 수울, 술로 변했다는 것이다. 술을 가리키는 별칭도 재미있다. 승려들은 술을 ‘곡차(穀茶)’ 외에 ‘반야탕(般若湯)’으로도 불렀다. ‘반야’는 범어(梵語) ‘Prajna’로 지혜라는 뜻이다. 따라서 반야탕, 즉 술은 ‘지혜의 물’이다. 술에는 또 사람의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한다는 뜻의 ‘도깨비뜨물’, 근심을 잊게 해준다는 의미의 ‘망우물(忘憂物)’ 등의 별칭이 붙었다.

술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고려시대의 문학작품에는 황금주, 이화주, 초화주, 녹파주, 황봉주 등 운치 있는 술 이름이 많이 나온다. 저자는 “우리 조상들은 멋있는 술 이름을 만들기 위해 춘(春), 로(露), 향(香) 등의 한자를 썼다”고 밝혔다. 백화춘, 봉래춘, 약산춘, 감홍로, 매화로, 감국로, 박하로, 만년향, 집성향 등이다. 고려 후기에는 청주, 탁주, 증류주 등 전통 3대 주종이 완성됐다. 이 가운데 탁주에 속하는 막걸리는 사발에 가득 붓고 쉬지 않고 비워야 제격인 술이다. 채만식의 수필에 잘 묘사돼 있다. ‘빡빡한 막걸리를 큼직한 사발에다가 넘실넘실하게 부은 놈을 처억 들이대고는 벌컥벌컥 한입에 주욱 마신다.’

조선시대에 소주는 고급술이었다. 성종실록에는 ‘요즘은 보통의 연회 때도 소주를 사용하고 있어서 비용이 막대하게 드니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에는 술의 효용을 ‘지궁지대(至窮至大)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슬퍼 마시며, 분하다 하여 마시며, 여름날이 덥다 하여 마시며, 겨울날이 춥다 하여 마시는 게 술인데 우리를 모든 경우에서 건져 주고, 북돋아 주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음주가 낳는 폐해를 들어 ‘술 무용론’ ‘완전 금주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금주운동이 펼쳐졌다. 이때 보급된 ‘금주가’는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는 내용을 담았다.

술 마시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주량에 따라 다양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객(酒客), 술을 많이 마셔도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은 ‘주호(酒豪)’, 광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광(酒狂)’, 이태백처럼 술을 잘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주태백(酒太白)’, 술 없이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된 사람은 ‘주당(酒黨)’, 세상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술로써 낙을 삼는 사람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렀다.

한국의 주호 가운데 한 명으로 저자는 고려의 문호 이규보를 꼽았다. 그는 “이규보는 술을 좋아했고, 술을 주제로 한 시를 수없이 남겨 고려의 이태백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오도일은 가뭄으로 금주령이 내려졌는데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기우제를 지내고 있는 숙종 앞에서 넘어졌다. 이 일로 유배령에 처해진 그는 유배지가 장성으로 정해졌다는 얘기에 “장성에도 소주가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저자는 음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인들의 작품 세계도 고찰했다. 이규보는 ‘술이 없으면 시도 무미하고/시가 없는 술은 물리쳐도 무방하지’라고 썼고, 김시습은 ‘술 있으면 근심은 이내 깨어지고/시 없으면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네’라고 노래했다. 저자는 “우리 조상들은 술 마실 때 일정한 법도를 지켰고 술을 마시면서 풍류를 즐겼다”면서 “그렇게 고상하던 전통 술 문화가 폭탄주 문화에 의해 훼손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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