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학, 장르를 박차다]<1>소설가 김유진 씨

  • 입력 2009년 6월 22일 02시 56분


비 내리는 음습한 날, 그녀의 ‘공포본색’이…

《‘한국문학은 따분하다’는 말은 오래된 편견이다. 문학에서도 매체 환경과 시대 변화에 맞춰 다채로운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SF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등 장르 문학적 요소들과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고, 텍스트를 벗어나 연극이나 퍼포먼스 형태로 독자를 만나기도 한다. 문단 안팎에서 주목받는 신인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문학의 달라지는 작가상을 포착했다.》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보다
작품 내적 설득력에 더 끌려
그로테스크하고 불쾌하다고?
핏빛 공포는 나를 매혹시켜요”

PC방에서 15시간째. 모니터를 보는 젊은 여자의 다크서클이 짙다. 신경질적으로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걸 보니 오늘도 별 진전 없이 ‘공친’ 모양이다. 라면을 주문받은 아르바이트생이 그를 흘끔거린다. 2주 연속 하루 열 시간이 넘게 한자리에 앉아 PC방 메뉴를 종류별로 다 시켜 먹고 있으니, 그 정체가 궁금할 법도 하다. 프로게이머 지망생일까? 채팅 중독자일까? 그도 아니라면 폐인? 모두 틀렸다. 마감을 앞둔 작가다.

여류 소설가 김유진 씨(28)는 2004년 명지대 문창과 재학 당시 등단했고 올해 소설집 ‘늑대의 문장’을 펴냈다. 시적 단문에 세기말적 그로테스크가 결합된 작품들은 “(만연한 상호 폭력과 희생, 원인 모를 재앙이란 ‘비극의 서사구조’로 인해) 매우 낯설고 불쾌하다”(평론가 김형중) “통상적인 소설의 관습에 역행하는 실험”(평론가 김영찬) 등 다양한 평을 받았다.

이 작가는 작품만큼 작업공간이 독특하다. 작가들이 즐겨 찾을 법한 아늑한 카페, 교외의 한적한 문학관, 책장에 둘러싸인 소박한 집필실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재학 당시엔 학교 앞, 현재는 홍익대 인근의 ‘괜찮은 PC방’을 뚫어 놨다”고 말한다. 일단 한 군데를 뚫어 놓으면 그곳만 찾는다. 그는 “전반적으로 웅성대는 소음, 빠른 컴퓨터와 편안한 의자, 밤낮 구분이 불가능한 어두컴컴한 환경에서 집중력이 상승한다”고 PC방의 장점을 열거한다. 가끔 주위 청년들이 내뱉는 욕설이 졸음을 쫓아줘서 금상첨화라나…. 이곳에서 전투를 치르듯 완성해낸 작품에는 이유 없는 폭사(暴死), 음험한 전설과 불길한 소문, 신체기형과 사지절단 등 생경한 세계가 펼쳐진다.

“굳이 장르적인 관심사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장르적 특성에 친숙한) 문화적 배경이 자연스레 묻어난 것 같아요. 현실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보단 작품 안에서 당위성과 설득력을 갖는 것에 끌리거든요. 기차를 타고 종착역에서 내리게 되듯, 첫 문장부터 독자들을 어디론가 휙 데려갈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죽은 엄마의 발목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고(‘마녀’), 아기 팔다리를 먹어치우는 여자에 대한 전설이나(‘움’) 대청 밑에 버려진 할머니의 시체에 눈을 맞추는 아이가 등장하기도 한다(‘고요’). 기존 한국 순수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과격한 하드코어 성향도 문제적이지만 작가는 정작 차분하게 설명할 뿐이다.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 매혹적인 것들에 대해 썼어요.”

이미지와 정서, 꽉 짜인 문장이 도드라지던 초기 단편들과 달리 최근 서사가 강화되는 면모가 보이고 있지만 그의 소설에서 스릴러나 공포문학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래 시인을 지망했던 그는 습작 시를 소설로 바꿔 쓴 작품으로 덜컥 등단했다고 한다. 그는 “등단 이후에 습작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학적인 혼란까지도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내게 맞는 몸(문체)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학적 변모 중에 반드시 써보고 싶은 것이 바로 공포소설. 어린 시절부터 ‘13일의 금요일’ ‘링’ 같은 고전 공포시리즈들을 마스터했다. 초현실적이거나 심리적으로 옥죄어 오는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가 꼽는 공포의 백미는 단연 ‘밀실공포’다. 제한된 공간이 주는 압박감,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사건은 ‘늑대의 문장’(어느 마을) ‘어제’(선상) 등 그의 여러 작품에서 이미 엿보이는 면모다.

작가가 손으로 목을 뎅강 내리치는 제스처를 취하며 “폐쇄된 공간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면서 감정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공포는 매혹적”이라고 말하는 것 못지않게, 이런 소설을 쓰려는 이유는 섬뜩하다. ‘공포 분위기가 주는 안온함’ 때문이라는 것. 설명을 좀 더 들어보면 얼핏 이해가 갈 듯도 하다.

“어렸을 때 어두운 방 안에서 강아지를 끌어안고 공포영화를 보던 때를 떠올리면 따뜻하고 아늑해요. 이야기 자체는 무섭고 끔찍하지만, 주변 공기는 포근하거든요. 비명을 지르고 눈을 가리면서 무서워하는 모습이 더없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는 “하루 종일 으슬으슬 비가 내리는 음습하고 질척한 날이면 제대로 된 공포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하더니 어스레한 창밖을 보며 덧붙인다. “…이제 곧 장마철이군요.” 이보다 더 기대되는 예고편이 있을까.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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