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아펠도른 기차역 광장에는 기운 듯 아닌 듯 완만하게 기울어진 기다란 모래 언덕이 있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것은 수많은 노란색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그려 놓은 모래 언덕의 벽화(壁畵)다. 은근하게 내려앉은 경사지를 가로막은 이 모래 그림은 조명의 점멸에 따라 마치 바람에 쓸리면서 서서히 출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광장을 설계한 네덜란드 조경건축가 로데베이크 발리온 씨(53)를 23일 오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2012년 완공 예정인 수원 권선구 아이파크시티 조경 설계자로 22, 23일 현대산업개발이 주최한 ‘도시계획과 건축의 새로운 시각’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발리온 씨는 아펠도른 광장 조경으로 지난해 네덜란드 디자인상, 트벤터 국립미술관 조경으로 2004년 미국조경건축가협회 디자인상을 받았다.
“조경 건축은 풍경을 아름답게 꾸미고 정원에 나무를 배치하는 단순 작업이 아닙니다. 조경건축가는 주어진 대지에서 어떤 가치를 더 찾아낼 수 있을지 늘 고민합니다. 자연이 부여한 이점을 살리면서 최선의 비주얼을 뽑아내는 ‘시스템’을 계획하는 작업이죠.”
아펠도른 광장은 조경 건축에 대한 발리온 씨의 설명을 실물로 보여준 사례다. 그는 이 반원형 광장에 커다란 소나무들을 듬성듬성 심어놓았다. 소나무는 아펠도른 시 인근 말고는 네덜란드 다른 지역에서 좀처럼 자라지 못하는 품종. 나무와 LED 벽화는 모래가 많은 이 지역의 독특한 토질을 상징하는 요소다. 고향을 오래 떠났다가 기차로 돌아와 지난해 완공한 이 광장을 처음 마주한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거의 언제나 해당 지역의 전통적 요소를 세밀히 관찰하면서 작업의 영감을 얻습니다. 디자인은 늘 혁신적이어야 하지만, 옛것을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로는 혁신에 이를 수 없죠.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의 흔적에서 뽑아낸 ‘대지의 개성’이 조경 디자인 콘셉트를 찾기 위한 실마리가 됩니다.”
간척으로 땅을 넓혀 사람의 손으로 조경을 만들어온 네덜란드에서는 조경전문가와 건축가가 함께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리온 씨도 이번에 함께 한국에 온 네덜란드 건축가 벤 판 베르컬 씨와 협력해 1990년부터 여러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했다. 그는 “조경건축가가 그려놓은 큰 밑그림 안에서 건축가의 작업이 이뤄지기도 하고, 반대로 건축가의 건물 계획에서 조경설계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모던한 감각을 살리면서도 옛 건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트벤터 국립미술관 정원 조경은 건물계획으로부터 조경디자인 영감을 얻었다.
“오래된 박물관과 약간 비껴 선 모양새로 주어진 용지에 베르컬 씨가 입면이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건물을 제안했죠. 두 건물 사이 호수와 정원에 여섯 번의 레벨 차를 두면서 모든 직선이 비스듬히 맞물리도록 계획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두 건물이 만난 모습을 조경에 이어낸 것이죠.”
아이파크시티 조경도 마찬가지다. 한국행이 처음이라는 발리온 씨에게 “수원이라는 도시가 가진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얼마나 찾아봤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지도를 펴들고 대지가 가진 ‘세 가지 문맥’을 짚어냈다.
“독특한 디자인의 화성(華城)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죠.(웃음) 그 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역사적 문맥, 용지를 비스듬히 관통하는 두 갈래 하천의 자연적 문맥, 주변을 둘러싼 산림의 문맥을 조경에 반영할 것입니다. 6000여 가구를 몇 동씩 묶어 용지를 분할한 뒤, 각각 인접한 문맥에 맞게 환경을 꾸미는 것이죠. 사람들은 거니는 곳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보면서 이 땅이 가진 이미지의 조각을 모아 각자의 커다란 그림을 완성할 겁니다.”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