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풍만한 것들은 감동을 품고 있다

  • 입력 2009년 6월 30일 02시 56분


청동조각 ‘앉아 있는 여인’.
청동조각 ‘앉아 있는 여인’.
라틴의 거리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광경을 포착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거리’. 그는 낯익은 거리에 근엄한 경찰과 수녀를 등장시켜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종교적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라틴의 거리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광경을 포착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거리’. 그는 낯익은 거리에 근엄한 경찰과 수녀를 등장시켜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종교적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세계적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展 오늘 서울 덕수궁미술관 개막

한결같이 넉넉하고 풍만하다. 꽃도 과일도 동물도 사람도 동글동글하게 실제보다 훨씬 부풀린 모습이라 그런가. 형태만 살짝 과장했을 뿐인데도 환상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기에 라틴문화에 뿌리를 둔 화사한 원색으로 풍자와 해학을 살짝 덧입힌 이야기를 녹여낸다. 보면 볼수록 정겹고 포근한 느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삶의 즐거움이 절로 되살아난다. 콜롬비아 태생의 세계적 화가이자 조각가 페르난도 보테로(77)의 작품이 가진 마법 같은 힘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주최하는 ‘페르난도 보테로’전이 30일∼9월 17일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 1985년 이후 최근작까지 회화 89점과 조각 3점을 회고전 형식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개막에 맞춰 내한한 작가는 “내 작품은 설명이 필요 없는 만큼 많은 사람이 전시를 보고 기쁨과 감동을 얻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과장된 비례와 풍만한 양감을 강조한 그의 조형작업은 사물과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감성을 일깨워준 점에서 평가받는다. 라틴 출신으로 20세기 구미의 미술사조와 상관없이 독자적 양식을 구축한 점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부대행사로 3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세미나실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마련된다. 전시 기간에 작품설명회와 라틴문화에 대한 릴레이 강연회도 열린다. 6000∼1만 원. 02-368-1414, botero.moca.go.kr

투우-서커스서 영감 받아 원색과 풍자로 라틴정서 표현

○ 거대한 세계, 거대한 꿈

얼핏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에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사회의 천태만상이 투영돼 있다. 이번 전시에선 정물과 고전을 패러디한 작업, 라틴의 삶과 사람들. 투우와 서커스 등 6가지 주제 아래 거장의 전모를 짚어간다.

그는 1954년 정물화의 만돌린을 그리던 중 우연히 양감을 부각하는 기법을 터득했다. 1층 전시장에서는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세련된 색감이 어우러진 다양한 정물화를 볼 수 있다.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나 투우사 학교를 다니며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작가. 미술관에서 거장의 작품을 만나고, 위대한 화가들이 쓴 책을 읽으며 미술사의 해박한 지식을 축적한다. 1960년대 이후 그는 고전미술을 독창적 스타일로 변형시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를 비롯해 라파엘, 고야, 벨라스케스, 루벤스 등 작품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이 나와 회화의 역사를 돌아보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신이 잘 아는 세계를 표현해온 그에게 투우와 서커스는 영감을 불어넣는 소재다. 투우장에서는 삶과 죽음의 긴장된 관계를, 곡예사를 통해선 화려한 박수 뒤에 남는 고독을 조명한다. 그는 카드놀이를 하고, 소풍과 춤을 즐기는 라틴 사람들의 유쾌한 일상과 더불어 자살이나 거리의 여인들처럼 사회의 어두운 단면도 놓치지 않는다. 화가는 현실 문제를 다룰 때도 직설적 고발이 아니라 은유적 표현으로 설득력을 증폭시킨다. 그림처럼 풍부한 양감이 두드러지는 조각들은 미술관 바깥에 선보였다. 그가 만든 대형 조각은 뉴욕, 파리, 피렌체 등의 광장에서 대중과 만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 라틴의 영혼을 만나다

같은 콜롬비아 출신의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문학을 통해 라틴문화의 웅숭깊은 매력을 길어 올렸다면, 그는 라틴의 영혼이 스며든 미술로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

‘나는 내 그림들이 뿌리를 갖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뿌리가 작품에 어떠한 의미와 진실함을 주기 때문이다. 항상 내가 손을 댄 모든 것이 라틴아메리카의 영혼으로부터 침투된 것이기를 바란다.’(보테로)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작가. 늘 자신이 살아온 세계, 그 기억의 밑바닥을 작품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단순한 미술작품의 감상이 아니라 라틴의 정치 사회 종교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난해한 개념이나 복잡한 기교로 치장하지 않고 평생 치열한 열정으로 완성한 거대한 세계. 그 속에 뿌리내린 따스한 서정과 감성이 현대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준다. 미술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그의 작품 앞에서 평등하게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이유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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