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지난달 24일 개봉된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을 두고 “이야기가 허황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건 옳은 지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지적이 못 된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관객을 유혹하거나 설득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뭐랄까. 이 영화를 보는 건 그 자체가 경험이다.
‘트랜스포머2’를 치켜세우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난 이 영화가 무섭다. ‘스필버그의 애제자’인 마이클 베이 감독의 이 작품은 싸구려 가족주의와 영웅주의, ‘개똥철학’을 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근원적으로 다른 ‘놈’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은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라는 오락영화에 대한 전통적인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그저 이렇게 소감을 말할 뿐이다. “우와!” 뭔가 굉장한 걸 경험했다는 느낌, 그걸로 족한 것이다.
나는 이 오락영화가 가진 태도에 주목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그래, 나 유치하다. 어쩔래. 이래도 안 볼래?’ 식의 무례하고 불학무식한 태도로 밀어붙인다. 2억 달러(약 2600억 원)가 투입된 이 영화는 물량공세의 진수를 보여주며, 영화의 서스펜스도 물량에서 비롯된다. ‘때려 붓는다’는 시쳇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표현일 것이다. 이건 그 자체로 돈이고, 힘이고, 권력이고, 미국이다. 만약 영화를 ‘여자’에 비유한다면, 이 영화는 분명 ‘못생기고(스토리가 부실하고) 마음씨도 나쁜(주제의식도 싸구려인) 여자’겠지만, 관객은 이 여자를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예쁜 여자’보다 더 치명적인 여자, 즉 ‘돈 많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톱니바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자폐적으로 디자인된 로봇들의 정교한 비주얼은 5분이 멀다하고 수십 ‘마리’씩 등장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육중한 기계와 첨단무기들은 섹시해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는 영화 속 여주인공 메건 폭스의 보디라인보다 더 싱싱하고 육감적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뿜어내는 ‘우웅∼’ 하는 저음과 폭발음은 어떤 인간의 신음보다 섹시하고 치명적이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며, 수십 수백 대의 트랜스포머들이 등장해 싸우는 굉장한 클라이맥스는 자그마치 30분이 넘도록 지속된다. 수십만 권의 책이 소장된, 지식의 산실인 대학도서관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이집트 피라미드를 눈도 꿈쩍하지 않고 때려 부수는 이 영화의 무식한 스케일에 관객은 금지된 쾌감까지 느끼며 압도된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컴퓨터그래픽(CG)이 동원되는 게 아니라, CG를 과시하기 위해 이야기가 필요악처럼 동원되는 것이다. 규모 자체가 이야기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선언하고 있다. 이젠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영화에서도 인간(배우)은 더는 중요한 출연자가 못 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디셉티콘’이란 악당 로봇들로부터 지구를 지켜주려는 착한 로봇무리 ‘옵티머스’의 우두머리 ‘옵티머스 프라임’이며, 시종 동분서주하는 ‘샘’(샤이아 라보프)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실마리요 조연에 불과하다.
영화 속 로봇들은 ‘싸가지’ 없는 인간들보다 훨씬 더 정(情)이 넘치고, ‘용기와 희생’이라는 이 영화의 키워드를 자신의 목소리로 전한다. “난 한번도 가치 있게 살지 못했다”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면서, 죽어가는 자기 몸의 일부를 다른 로봇에게 기증하는(일종의 ‘장기기증’이다) 성스러운 인격체로 다뤄진다. 심지어 흥분된 연기 톤을 조절하지 못하는 샤이아 라보프와 메건 폭스에 비해, 정중동(靜中動)의 깊이가 녹아있는 로봇 옵티머스 프라임의 내면연기는 단연 2010년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감인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75년 ‘죠스’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막을 연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트랜스포머2’를 맞아 새로운 전기를 맞은 듯하다. 조지 루커스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대작 ‘스타워즈’를 세 번째 에피소드부터 만들었다고 밝혔지만(4∼6편을 먼저 만든 루커스는 그간의 기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1∼3편을 만들었다), 이젠 기술과 표현의 한계도 사라졌다.
상상력은 힘이고 돈이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영화로 구현되는 시대다. 이런 무지막지한 할리우드 영화를 한국영화는 어찌 대적할 터인가. 이런 뻔뻔하고 무섭고 큰 상상을 할 대중예술가들을 우린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고교 내신을 절대평가로 바꾸고 특목고 입시에서 구술면접을 없애면, 정녕 이런 인재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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