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학번. 공동체를 강조한 386세대의 언저리에 있었지만 386세대도 아니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포스트 386세대에 끼기도 어색한 ‘낀 세대’. 극단 드림플레이의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작·연출 김재엽)는 바로 이 세대의 애환을 담아낸 수작이다. 》
극단 드림플레이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낮엔 민중가요, 밤엔 서태지 노래
운동권과 자유영혼 오가며 방황
주인공은 서울 신촌에 있는 대학 국문과 91학번 동기 4명이다. 국문과 박사과정을 자퇴한 현식(우돈기), 일간지 문학담당기자 광석(선명균), 독립영화감독 재하(김원주), 96년 연세대 사태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유정(김유진). 공간은 신촌에 실재했던 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이다. 극중에서 유정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서점을 헌책방으로 새로 개장하고, 세 친구는 10여 년 만에 나타난 ‘희미한 옛 사랑’을 찾아 오랜만에 모인다.
세 친구는 이 공간에서 지금은 아무도 읽지 않는 그러나 대학시절 그들에겐 영혼의 낙인과 같았던 책들에 대한 추억에 젖는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살아남은 자의 슬픔’ ‘타는 목마름으로’ ‘입속의 검은 잎’ ‘열린사회와 적들’…. 하지만 그 추억의 나침반은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시절과 당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현재의 간극을 일깨우는 송곳이 된다.
그들은 머리 셋 달린 한 마리의 뱀과 같다. 몸통은 그들 모두 사랑했던 유정이고, 그들이 존경했던 87학번 선배 지원이다. 운동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유정에 대한 열정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그들을 지적으로, 윤리적으로 압도하는 지원을 만나면서 ‘꽃병’(화염병의 은어)을 던지고 심지어 몸에 휘발유를 붓는 극단적 행동도 불사한다.
하지만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열창했던 그들은 곧 눈치챈다. 자신들은 뭘 해도 어설픈 존재라는 것을. 이는 학생회장 후보였던 재하가 87학번 선배들을 향해 던졌다는 독설에 고스란히 담겼다.
“형들 1학년 때, 이한열이 죽었을 때는 온 국민이 다 일어났고, 길거리에 나가면 다 박수쳤다는데, 우리 1학년 때는 강경대가 죽었고, 김귀정이 죽었고, 박승희도 죽었고, 또 수없이 죽었는데, 죽음의 굿판이나 걷어치우라는 얘기만 들었다.”
죽음의 굿판을 언급한 김지하 시인의 시 ‘무화과’를 인용하자면 그들에겐 386세대가 누렸던 ‘꽃 시절’이 없었다. 낮에는 ‘민중의 노래’와 같은 민중가요를 목청껏 부르면서 밤에는 서태지의 노래를 남몰래 들어야 했던 그들에겐 ‘상처뿐인 영광’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전대협 출신은 국회의원이 되는데 9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한총련 출신은 수배 중이라는 현실에 대해 “출신 성분이 다르잖아”라는 냉소적 반응은 이들 세대의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를 상징한다.
그럼에도 현장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분신자살한 선배 지원은 그들의 열등감과 죄의식의 원천이다. 그 지원을 좇아 불나비처럼 몸을 사른 유정은 ‘뼈아픈 후회’의 대상이다. 유정을 기다리는 세 남자가 공연 내내 5000여 권의 책이 꽂힌 서가의 주변을 계속 서성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방황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뒤늦게 나타난 ‘환상 속의 그대’, 유정이다. 유정은 지원이 분신자살한 것이 아니라 실족사한 것이며 자신도 그들과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구원이 진짜일까. 어쩌면 지원이야말로 평등세상을 꿈꾼 386세대와 영혼의 자유를 꿈꾼 포스트 386세대 사이에 잠재된 폭력의 분출을 막기 위해 희생된 무고한 진짜 희생양 아니었을까. 또 죽은 지원을 ‘신성한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함께 묻어버리려던 91학번의 어설픈 집단 무의식이 유정에 의해서 폭로된 것은 아닐까. 의식 있는 대학생의 기피곡이었던 신해철의 노래가 의식 있는 저항가요로 둔갑한 현실 앞에서 문득 이런 불온한 상상을 펼쳐본다. 5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 02-745-456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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