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의 땅에는/200가지의 식물이 산다고 했다/그렇다면 마당 한 평에 200편의 시가/…/마흔 넘어 스무 평의 마당을 가진 나는/4000편의 시 창고를 가진 부자’(‘마당론’ 부분)
한여름 텃밭은 먹을거리 천국이다. 여기저기 맛있는 식당 찾아 기웃거릴 필요 없다. 왜 발품 팔아가며 비싼 돈까지 들이는가. 텃밭에 가면 다 있다. 무 상추 배추 부추 쑥갓 고추 호박 깻잎 아욱 오이 가지 수박 머위 토란 콩….
도시 아파트라고 못하란 법 없다. 베란다 정도면 웬만한 채소는 다 키울 수 있다. 옥상 있는 집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한 가족 여름 쌈밥채소 공급에 전혀 문제가 없다. 뜯어도 자꾸 돋아난다. 게다가 정말 무농약 채소인지, 아니면 저농약 채소인지, 그딴 생각 안 해서 좋다.
한국인들은 쌈밥 마니아들이다. 채소 이파리라면 그것이 뭐든 잘도 싸먹는다. 쌈밥은 이어령 선생(75)이 즐겨 말하는 ‘쌈(包)문화’ 즉 ‘보자기문화’의 좋은 예다.
“서양인들은 가방이나 상자를 사용한다. 가방은 무슨 물건을 넣더라도 그 크기와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규격화되고 꽉 짜여 있어 융통성이 없다. 하지만 보자기는 물건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졌다, 세모 네모 둥근 것 등 모양이 수시로 변한다. 그러다가 내용물이 사라지면 손아귀에 들어갈 만큼의 평범한 조각천이 된다. 바지 끈이나 옷고름으로 풀었다 조였다 하는 한복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넉넉하다.”
쌈은 뭐로든 쌀 수 있다. 보자기처럼 너풀거리는 채소나 바다풀이라면 다 좋다. 상추 쑥갓 머윗잎 호박잎 연잎 곰취 배추 깻잎 고구마잎 콩잎 참나무잎 치커리 미나리 김 미역 다시마…. 내용물도 뭐든 넣을 수 있다. 쌀밥 보리밥 오곡밥 삼겹살 등심 생선 멍게 전복 문어 오징어 젓갈 강된장 생마늘…. 한순간 대충 싸서 입이 터져라 넣으면 그만이다.
쌈맛은 손맛이 우선이다. 손바닥 위에 놓여진 상추는 야들야들하다. 호박잎은 꺼끌꺼끌하다. 곰취는 두툼하고, 머윗잎은 약간 푹신하다.
손맛은 곧 입맛으로 옮겨간다. 곰취나 머위쌈은 혀끝에 약간 씁쓰름한 맛이 걸린다. 소설가 황석영은 “백두산에서 양념장을 쳐서 싸 먹던 야생 곰취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호박잎은 목구멍을 시원하고 간질간질 쓸고 내려가는 맛이 좋다. 밥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밥물에 찐 호박잎이 으뜸이다. 밥물이 약간 밴 호박잎이나 머윗잎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양배추는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헹군 뒤, 물기를 빼내 싸먹는다. 고소하다.
쌈밥은 일단 입안에서 터지기 시작하면 온갖 맛이 뒤죽박죽 황홀하다. 강된장의 짭조름 구수한 맛이 나다가, 갑자기 생마늘이 우지끈 깨물리면서 코를 톡 쏜다. 멍게젓의 향긋한 바다냄새가 나는가 하면, 한순간 삼겹살의 고소한 맛이 솔솔 풍긴다. 한마디로 쌈밥은 ‘입속의 비빔밥’이다.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은 서자 출신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홀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그를 키웠다. 그런데도 그는 늘 쾌활했다. 친구들도 그에게만은 속내를 다 털어놓았다. 이덕무(1741∼1793)가 책 ‘맹자’를 팔아 양식거리를 샀다는 얘기를 한 것도 그였다. 그는 자신의 책 ‘좌씨전’을 팔아 이덕무에게 술을 사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는 메모광이었을 정도로 꼼꼼했다. 소매 속에 늘 종이와 붓을 넣고 다녔다. 상추쌈에 관한 시도 그의 치밀한 관찰력에서 나왔다.
‘밥숟갈 크기는 입 벌릴 만큼/상추 잎 크기는 손 안에 맞춰/쌈장에다 생선회도 곁들여 얹고/부추에다 하얀 파도 섞어 싼 쌈이/오므린 모양새는 꽃봉오리요/주름 잡힌 모양은 피지 않은 연꽃//손에 쥐여 있을 때는 주머니더니/입에 넣고 먹으려니 북 모양일세/사근사근 맛있게도 씹히는 소리/침에 젖어 위 속에서 잘도 삭겠네’
경북 경주에 가면 쌈밥골목이 있다. 이 중에서도 삼포쌈밥(054-749-5776) 구로쌈밥집(054-749-0600)은 이름났다. 서울 영동시장 원조쌈밥집(02-548-7589), 서울 잠실역 유기농 쌈밥집 수다(02-415-5300), 서대문구 창천동 초당쌈밥집(02-313-0537) 등도 눈에 띈다.
쌈밥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강된장이다. 집 된장 몇 숟가락에다가 쌀뜨물을 붓고, 애호박 다진마늘 양파 청양풋고추 등을 넣어 되직하게 끓이면 된다. 생선조림이나 간자미무침 멸치조림 같은 것을 얹어 먹어도 맛있다.
아침 이슬에 흠뻑 젖은 텃밭의 채소들. 빗방울 둥글둥글 떨어지는 연잎. 너울너울 코끼리 귀 같은 호박잎.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핀 고향마당 평상 위에서, 온 집안 식구 빙 둘러앉아 볼이 터져라 먹던 상추쌈밥. 형 누나와 눈 흘기며 먹다가, 웃음보가 터져 산산이 입안 쌈밥이 터져 나왔던 추억. 매캐한 초저녁 모깃불 냄새, 상추쌈을 입에 반쯤 넣고 있는 찰나, 아뿔싸 모기가 장딴지를 물고 있다. 별수 없다. 그저 꾸역꾸역 그냥 입안에 밀어 넣을 수밖에.
상추는 채소의 대장이고, 상추쌈은 ‘국민 쌈’이다. 원래 ‘생채(生菜)’가 변해서 상추가 됐다. 상추쌈에는 깻잎을 넣는 게 좋다. 깻잎은 철분과 무기질 많은 알칼리 식품이다. 상추쌈을 먹고 나면 나른하고 졸음이 온다. 락투신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없는 쌈이 없다. 고기쌈, 가지잎쌈, 깻잎쌈, 다시마쌈, 머윗잎쌈, 미나리쌈, 미역쌈, 배추쌈, 배추속대쌈, 시금치쌈, 쑥갓쌈, 아욱쌈, 알쌈, 얼간쌈, 전복쌈, 참죽쌈, 통김치쌈. 취쌈…. 북한에선 ‘닭알 쌈밥’이란 것도 있다. 계란덮밥을 일컫는 말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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