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9>

  • 입력 2009년 7월 5일 13시 39분


27장 강철 슈트의 비밀

"저 혼자 모든 비밀을 안고 무덤 속까지 가겠습니다."

석범은 2009년 인기를 끌었던 과학수사 드라마 CSI의 취조실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던 범인들이 늘 뱉던 문장을 떠올렸다. 그 중에서 정말 무덤 속까지 비밀을 가져간 이는 없다.

노윤상 원장의 사체가 발견된 곳은 로봇 방송국 <보노보>의 상징탑 꼭대기였다. 보안청 특수대 형사들이 이중삼중으로 방송국을 에워쌌다. 여섯 개의 발을 지닌, 49미터 상징탑은 햇빛의 양과 바람의 세기, 습도에 따라 5미터 이상 높낮이를 조절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낮에는 54미터까지 늘어났고, 폭우 쏟아지는 여름 밤에는 44미터까지 줄어들었다.

탑 꼭대기에는 두 사람이 겨우 앉을 만한 벤치가 놓였다. <보노보> 사장 찰스의 벤치였다. 찰스는 이곳에서 둘만의 은밀한 데이트를 즐겼다. 바람과 햇빛과 습도에 따라 탑이 흔들릴 때마다 여인은 비명을 질러댔고 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의자에서 황금빛 강철 슈트를 입은 노윤상 원장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노 원장이 단 한 번도 슈트를, 그것도 강철로 만든 슈트를 입은 적이 없기 때문에, 형사들은 사체로 접근하지 않고 기다렸다.

방송청 자료부에서 보안청으로 급보가 날아들었다. "7월 6일 황금 폭탄이 원숭이들의 하늘에서 빛나리"라는 제목의 성명이 어제 자정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숭이'는 '보노보'를, '황금'은 '강철 슈트'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이 성명서를 자신들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자연인 그룹이 열 군데가 넘었다.

석범과 민선은 방송국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노 원장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었다. 사망과 동시에 세상에 공개된 영상유언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민선은 걸음을 멈췄다. 노 원장은 진료실 의자에 편히 앉아서 엷은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이었다. 등 뒤에는 꺼풀을 씌운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혔다.

"……우리는 9년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들은 국가를 해체하고 특별시를 일반시와 오염지대로부터 떼어냈습니다. 지금 특별시민은 로봇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특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은 오직 로봇을 통해 듣고 알고 느낍니다. 홀로 오롯이 모든 것을 관장하던 참 인간의 시절을 위해 싸웁시다……."

만약을 대비해서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디지털 장비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숨소리보다도 더 미세하고 규칙적인 떨림만으로도 폭발하는 폭탄이 최근 발명되어 화제를 모았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민선은 아버지를 잃은 사람답지 않게 무표정하고 걸음걸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딱 두 계단 뒤에서 그녀를 따르던 석범이 14층을 지난 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연인 그룹을 후원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강경한 유언장을 남기시다니 의왼 걸."

"도피에요."

민선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저렇듯 강한 어조로 특별시 체제와 맞서자고 선동하는데, 도피라고?"

"정말 맞설 사람은 벌써 특별시를 떠났거나 남더라도 신분을 감추고 숨었어요. 보안청의 도움을 받아 평생 병원을 해왔으면서 유언장만 으리으리하게 남기는 건 비겁이에요."

도피에서 비겁으로 튀었다. 공개된 유언장 때문일까. 긴 계단 탓일까. 상암 경기장에서 비보를 접하고 당황하던 모습은 깨끗이 사라졌다.

경호 로봇들이 옥상 입구를 막아섰다.

석범은 손목 혈관 확인을 통해 출입이 허락되었지만 민선은 제지당했다. 망인의 딸이라고 밝혔지만, 경호 로봇들은 사사로운 정이나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석범이 경호로봇팀 책임검사와 통화를 하고 신원보증을 선 다음에야 민선은 옥상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검사님! 여기까진 뭣 하러 오셨습니까?"

얼굴이 익은 특수대 젊은 형사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반가운 표정이 아니다. 뒤따라온 다른 형사가 민선을 위아래로 훑으며 거들었다.

"위험합니다요. 내려가세요."

"경호로봇팀장의 허락을 받았소."

"경호 로봇팀은 로봇팀이고 여기부턴 특수대가 직접 맡습니다. 저 민간인 여성은 안 됩니다."

민선이 둘 사이를 뚫으려 했지만, 형사들은 틈을 주지 않았다.

"비켜! 난 노윤상 원장의 딸이야."

"출입통제구역입니다. 일급 위험구역이다 이 말씀입니다. 제 아무리 망자의 자녀라고 해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내려가세요.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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