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태어난 지 10일로 꼭 500년이 됐다.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의 벽’ 석상에 갇힌 칼뱅이 요즘 매일 밤 살아서 걸어 나온다. ‘종교개혁의 벽’ 앞에 임시로 설치된 극장에서 야외 연극 ‘칼뱅-불속의 제네바’가 공연되기 때문이다. 무대는 1909년 칼뱅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실제 종교개혁의 벽. 장로교의 시조인 존 녹스 등 칼뱅의 충성스러운 세 동지의 석상이 칼뱅의 석상을 호위하고 있고 그 아래 한 무신론자 배우가 ‘인간 칼뱅’을 되살려내기 위해 연기한다.
칼뱅의 이미지는 대체로 고집 세고 엄격하다는 것이다. 기쁨과는 거리를 두고 산 사람, 전제적인 신정(神政)정치가의 이미지도 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칼뱅파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독일의 카를 바르트는 “우리 중 누구도 그곳(칼뱅이 통치하던 제네바)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에서 관객은 ‘모순 속의 인간 칼뱅’을 만난다. 칼뱅적 금욕의 비판자들 앞에서 스위스의 ‘라 코트’산 화이트 와인을 거절하지 않는 칼뱅, 아내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을 토로하는 칼뱅, 설교자의 강단을 끊임없이 낮추려 한 칼뱅, 학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뱅.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오르간을 뜯어내고 다성(多聲)합창을 단순제창으로 바꾸고 결혼식의 댄스파티조차 금지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제네바 종교개혁의 중심지 상피에르 교회. 과거 칼뱅이 설교했던 이 교회의 뱅상 슈미트 담임목사에게 칼뱅 탄생 500주년 행사 계획을 물었다. 그로부터 “칼뱅이 그것을 원할까”라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슈미트 목사는 “가톨릭은 성인 만들기에 열중했지만 칼뱅은 그것을 모조리 없앴던 사람”이라며 “자신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든 칼뱅을 또 하나의 성인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칼뱅 500주년은 400주년에서와 같은 기념물(종교개혁의 벽)을 세우지 않았다. 신도들의 대형 집회도 없다. 고정관념을 넘어선 ‘진짜(real) 칼뱅’을 발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제네바 국제종교개혁 박물관에서 열리는 ‘칼뱅의 삶에서의 하루’라는 전시도 그렇다. 전시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9시에 잠자리에 드는 칼뱅의 하루를 통해 그의 삶을 조명한다. 많은 사람이 칼뱅을 얘기하지만 정작 칼뱅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이곳에서는 칼뱅의 말을 살아있는 것처럼 들을 수 있다. “난 자주 고기 대신 다른 음식을 택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날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피하는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칼뱅은 위장병으로 고생했고 그 때문에 마르고 날카로워 보였지만 사실 고기 먹는 기쁨을 잘 알고 있었다.
칼뱅에 대한 오해는 이단자로 몰린 세르베투스의 처형에서 극에 달하고 그는 ‘제네바의 교황’이라고까지 불린다. 그러나 공연 전시가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칼뱅은 그의 처형을 원하지 않았고 좀 더 덜 잔인한 형벌로 끝나길 원했다.
유럽 대륙에서 칼뱅의 영향력은 영미권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올해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외에 프랑스까지 가세해 칼뱅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왔다. 칼뱅은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났고 파리 오를레앙 부르주에서 공부했지만 프랑스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이브 크뤼므나케르 리옹3대학 교수는 “과거 프랑스와 독일의 사이가 나쁠 때 칼뱅주의자는 루터주의자와 사상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나쁜 프랑스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의 개신교권뿐 아니라 가톨릭권에서조차 칼뱅을 베네딕트나 프란체스코처럼 가톨릭을 개혁하려 했던 인물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고 전했다.
:장 칼뱅은:
제네바=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 칼뱅과 한국 개신교는
장로회 전한 언더우드도 칼뱅파
장 칼뱅과 한국은 존 녹스라는 스코틀랜드 목사를 매개로 연결된다. 칼뱅처럼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위스의 제네바에 와 있던 존 녹스는 칼뱅에게 배우고 함께 일한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장로회를 설립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회는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장로회를 형성했고 그것이 다시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언더우드 목사는 미국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철저한 칼뱅주의 교육을 받은 선교사였다. 한국은 지금 개신교 신도의 절반 이상이 장로교인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칼뱅주의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9일 제네바에서는 주로 영미권 15개 칼뱅주의 신학교가 주최하는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국제회의는 미국 위스콘신대의 로버트 킹던 교수와 제자 윌리엄 매코미시 교수가 주관했다. 킹던 교수는 나이가 많아 참석하지 못하고 그 논문을 매코미시 교수가 대신 읽었다. 회의에 참석한 필라델피아 한인교회 김재성 목사에 따르면 킹던 교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매퀸 킹던(한국명 윤산원) 숭실대 학장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칼뱅주의자들이 여전히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네바=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정치권력 갖고있지 않았던 칼뱅, 독재자라 하기 어려워 ”▼
크뤼므나케르 佛리옹3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