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침묵의 가지’ 끝에 맺힌 것

  • 입력 2009년 7월 11일 02시 59분


시간-이미지, 문창배, 그림 제공 포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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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빨간 사과를 먹는 제자에게 스승이 물었습니다. 맛이 어떠냐? 제자는 아주 맛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그 맛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 사과의 맛은 사과에서 오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사과는 어디에서 왔느냐? 제자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사과나무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제자는 대답을 못한 채 먹는 동작을 멈추고 손에 든 사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며칠 뒤, 제자가 빨간 사과를 들고 다시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고심한 문제에 대해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사과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스승은 제자의 생각은 옳으나 표현이 틀렸다고 정정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럼 사과가 빨갛다는 사실도 안다고 말할 수 없나요?

스승은 근본적으로 ‘색’이란 없다고 말했습니다. 눈에 빨간색으로 보이는 사과는 760나노미터 정도의 파장을 가진 전자기파이지 물질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진동이 눈의 망막을 때려 색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물이 그와 같은 이치라면 세상은 홀로그램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곧 공(空)이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물질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속이 텅 빈 전자기적 인력을 지닌 에너지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본질이 그와 같다면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본질과 무관합니다. 그래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고심하던 제자가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럼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스승은 제자가 기특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것,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가감 없는 현실을 살고 가감 없는 존재로 머물러야 한다. 보라, 그리고 회의하라. 얼마나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말들이 세상에 가득 찼는가!”

무책임하고 무절제하고 무의미한 말이 범람하는 세상입니다. 말을 낳고 말을 키우고 말을 나누며 사는 게 인생이니 말을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정으로 바위에 아로새기고 끌로 청동에 파는 일보다 아픈 상처를 사람의 마음에 남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는 말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 있고 입이 모든 화의 근원이 된다(구시화문·口是禍門)고 했습니다. 진정한 말은 사유와 침묵의 가지 끝에 맺히는 소중한 결실이어야 합니다.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항상 되새기며 살아야겠습니다.

작가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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