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이 있다. 소리 없는 경쾌한 선율이 느껴진다. 리본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길게 물결치는 나무판자. 때론 벽을 뚫고 나온 듯 때론 바닥에서 치솟은 듯 자유롭게 춤추며 원을 만들면서 공간에 평온한 쉼표를 찍는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소마미술관 6전시실에서 열리는 ‘나무가 종이를 만나다’전은 종이가 아닌 공간을 배경으로 한 드로잉을 만나는 자리다. 포플러 나무를 가공해 조형작업을 하는 보리스 쿠라톨로와 종이작업을 하는 메리 설리번의 공동작품. 두 사람은 1주일 동안 틀어박혀 전시장에 꼭 맞는 설치작업을 완성해냈다. 창밖으로 푸른 잔디가 펼쳐져 안에서 감상해도 아름답고, 밖으로 나가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느낌도 매력적이다.
소마미술관은 이와 더불어 드로잉과 조각에 대한 사고를 전복시키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드로잉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드로잉조각: 공중누각’전과 소품 조각들을 선보이는 ‘슈박스’전. 장마로 우중충해진 마음을 뽀송뽀송하게 해줄 만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전시들이다. ‘슈박스’전은 8월 16일까지, 나머지 전시는 8월 30일까지. 입장료 1000∼3000원. 02-425-1077
○ 드로잉과 조각, 손잡다
조각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공중누각’전에선 드로잉 같은 입체, 조각 같지 않은 조각을 볼 수 있다. 조각은 무겁다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양감이 최소화된 작품들은 ‘여백’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참여작가 6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각에 대한, 드로잉에 대한 유연한 생각을 풀어낸다. 김세일 씨가 철사로 만든 망구조물의 경우 ‘내가 여기에 있다’고 외치기보다 ‘여기에 이만한 공간이 있다’고 속삭이는 설치작품.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조형물의 실체감은 희박한 대신, 그림자의 실체감은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실재와 허상의 관계가 역전되는 지점이다.
낚싯줄 위에 작은 돌멩이를 얹어놓은 전강옥 씨의 작품은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동시에 ‘생명의 순간성’에 대한 숙고를 유도한다. 불안정한, 동시에 순간적 균형을 유지하는 작품에 대해 작가는 ‘살아있는 순간’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스타킹을 올올이 풀어내 잡아당긴 함연주 씨의 작업은 부드러운 소재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약한 것이 되레 강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삶에 대한 명상을 촉발한다.
쪽 염색을 한 섬유를 소재로 사유적 공간을 만들어낸 장연순 씨, 나일론 줄에 숯을 매달아 여백이 지닌 긴장감을 연출한 박선기 씨, 고속도로를 찍은 사진을 가늘게 오려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을 포착한 강영민 씨의 작업은 새로운 공간의 경험을 유도한다. 평론가 고충환 씨는 이들 작업을 “공간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상호 침투되는 조각, 공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조각, 공간과 함께 형성되는 조각”이라고 설명한다.
○ 작지만 강하다
청동으로 만든 작은 의자, 쿠션 위에 올라선 유리 돼지, 털실 옷을 입은 코끼리 등. 30×20cm의 신발상자 안에 들어갈 만한 크기 이내로 제작된 소품 조각을 모은 ‘슈박스’전의 풍경은 마치 아기자기한 장난감 천국 같다. 1982년 미국 하와이대가 큰 부피와 무게 때문에 국제 순회전이 힘들었던 조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이 전시는 올해로 10회째를 맞는다.
앞코만 있는 철사 고무신을 출품한 김지은 씨는 문화적 충돌을 표현하고, 머리카락을 뭉쳐 벽돌을 만든 구원다 씨는 가치 없어 보이는 것 속에 숨은 인간적 가치를 이야기한다. 한국을 처음 찾은 슈박스전에선 15개국 작가의 81점을 볼 수 있다. 크기는 작아도 금속, 도자기, 섬유 등 온갖 재료와, 사실적 작품에서 개념적 작업까지 다양한 표현방식을 활용한 작품들이 현대조각의 웅숭깊은 세계를 가늠하게 해준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