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귀족이 서민에 베푸는
일방적-시혜주의 성격 강해
동양선 아랫사람 도리도 강조
수평적으로 화합하는 덕목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격차의 문제를 줄일 수 있는 제3의 자본이다.”(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면면히 내려오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이 끊겼다. 지금은 다시 발동을 거는 시기라고 본다.”(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저자) “서양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충서(忠恕)의 정신이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가진 수직적·일방적 특성을 수평적·상호적으로 극복한 덕목이 충서다.”(김일현 공주대 한문학과 교수) ‘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 재산 사회 환원과 검찰총장 후보자의 청문회 도중 사퇴를 계기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2002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책을 쓴 현 교수는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실천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현 시대에는 부, 권력, 명성을 가진 사회지도층이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라고 규정했다.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는 기부나 봉사와 같은 능동적 측면과 법과 도덕을 준수해야 하는 수동적 측면이 있다고 분류했다. 그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자수성가 등으로 부와 권력을 쥐게 된 신귀족층이 유독 자신의 가족이나 친족을 먼저 챙기는 전근대성을 여전히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성공이 친족이 아닌 우리 사회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한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전통 명문가의 이웃과 사회에 대한 베풂을 조사해 책을 낸 조 씨는 “주역의 문언전(文言傳)을 보면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 나온다.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경사가 넘친다’는 이 말이 우리나라 명문가들에 대대로 이어져오는 가훈(家訓)이었다”고 소개했다. 불교의 ‘보시’나 유교의 정통 양반문화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맥이 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조 씨는 “충청도 명재 윤증 가문에서는 조선 후기 뽕나무가 농민의 주요 생계용 작물이었을 때 ‘윤씨 집안에서는 절대 양잠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며 “서민의 먹고 살길을 걱정한 사람들이 양반이었다”고 전했다. 역사 속에서도 지도층의 헌신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귀족 자녀로 구성된 신라 화랑이 전장에서 앞장선 것을 비롯해 고려시대에 신분이 높았던 승려들이 ‘항마군’을 만든 것이 모두 일종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우리 선조들의 충서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충(忠)’은 자기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서(恕)’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뜻한다. 즉, 자신의 완성을 통해 사회봉사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실천한다는 의미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는 귀족이 서민을 위해 덕을 베푸는 일방성이 있지만 충서는 아랫사람도 자신의 할 일과 도리를 다해 윗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상호작용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사회의 화합과 화해를 위해서는 충서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특정한 지위에 있거나 부를 가진 사람만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충서를 실천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회통합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