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8>

[살벌한 전초전]

글라슈트가 슈타이거를 이기고 결승전 티켓을 거머쥔 다음 날 저녁, 무사시(동경, 우승확률: 45/100)와 졸리 더 퀸(뉴욕, 우승확률: 40/100)의 4강전이 벌어졌다.

로봇애호가만의 전쟁이던 '배틀원'은 올해부터 그야말로 전 지구적 관심사가 되었다. 글라슈트와 슈타이거의 지저분한 행동 때문에 대회는 더욱 열기로 달아올랐고, 로봇격투기에 무관심하던 특별시민에게도 이번 배틀원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사람들이 모이면 경기 결과를 점치느라 시끄러웠다.

무사시와 졸리 더 퀸의 4강전은 '배틀원 2049' 경기 사상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모인 경기였다. 도박사들은 여기서 이긴 팀의 우승확률을 85%로 점쳤고, 그 중에서도 무사시 쪽에 좀더 우승의 무게를 두었다. 7만 관중이 열광하는 상암동 경기장에서 무사시와 졸리 더 퀸은 21세기 중반 로봇공학기술의 현주소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초반에 기세를 잡은 쪽은 졸리 더 퀸이었다. 빠른 발과 가벼운 몸을 이용해 왼쪽으로 회전하거나 1미터 이상 점프하면서 옆차기와 돌려차기로 무사시를 두 번이나 쓰러뜨렸다. 졸리 더 퀸은 채찍을 연상시키는 꼬리로 무사시를 여러 차례 후려치기도 했다. 그 파워는 상대를 죽음의 고통으로 내몰 만큼 대단했다. 무사시 측은 심하게 항의했지만, 졸리 더 퀸의 꼬리는 추가된 팔다리라고 하기엔 규정보다 얇았고 흉기라고 보기엔 둔탁해서, 규정에 위배되는 부착물은 아니었다.

무사시는 마음을 알 수 없는 날카로운 눈으로 기회를 노리다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졸리 더 퀸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옆차기로 덤비는 그녀의 길게 뻗은 다리 사이로 재빠르게 몸을 집어넣더니, 꼬리와 오른쪽 다리를 잡고 여섯 바퀴나 돌린 후 내동댕이친 것이다. 졸리 더 퀸이 다소 가볍기도 했지만 무사시의 팔 근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한 순간에 무너져 아쉬웠던지, 관객은 경기가 끝나고도 한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무사시! 무사시!"를 연호했고, 무사시는 무대를 돌며 인사를 했다. 고다이바 블랙 빛깔의 졸리 더 퀸과 인디고 블루 톤의 무사시. 사람들은 그들의 자태와 빛깔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이 시합을 관전한 최 볼테르 일행의 마음은 매우 불편했다. 결승에서 싸울 상대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가야한다고 보르헤스가 억지로 이곳까지 오게 했지만, 볼테르는 영 내키지 않았다. 무사시의 힘과 속도에 압도되기도 했고, 관람객의 일방적인 환호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결승전의 상황이 미리 보이는 것 같아서…… 아팠다.

결승전은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 '글라슈트'와 예정된 결승 후보 무사시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보노보>는 연일 결승전에 대한 예측과 다양한 정보, 지난 경기를 보여주며 분위기를 한껏 달구었다. 무사시의 우승을 점치는 전문가가 훨씬 많았다. 거기에는 감정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4강전의 지저분한 행동으로 글라슈트의 인기가 급강하한 것이다. 하기야, 잃을 팬도 별로 없었지만. 8강전까지 글라슈트의 존재를 누가 알기나 했을까.

4강전이 끝난 후 3일째, 그러니까 결승전이 열리기 4일 전, 한강의 구리요트경기장에서 인공섬 '스리자야' 사이를 오가는 유람선 '바와'에서 두 결승전 진출팀과 함께 쇼케이스가 펼쳐졌다. 스리자야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옛 스리랑카의 수도)와 서울이 '특별시공동체' 수교를 맺으면서,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네에서 한강에 지어준 인공섬이다. 특별시는 이에 화답해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남아시아 열대지방 건축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제프리 바와의 이름을 딴 유람선을 운항하도록 했다. 그는 외부와 내부의 구분에 있어 인테리어 디자인과 조경의 장벽을 허물고 아시아 열대 지방에 적합한 건물 원형에 대한 표준을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이 유람선은 거대한 열대 지방의 집과 정원을 연상케 했다. 얼핏 보면 방갈로처럼 보였지만 내부는 첨단 장치들과 모던한 디자인이 눈에 띄었고, 은은하면서도 여유로운 조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고위층 자제들이 결혼할 때 자주 애용되는 파티 전용 초호화 유람선으로 주목받았다.

<보노보>는 이곳을 일찌감치 예약해 두고 가장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케이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온 기자들이 두 로봇과 로봇공학팀의 수장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오늘 쇼케이스의 사회는 로봇MC 남이었다. <보노보> 개국 축하쇼를 진행한 인연으로 그는 보노보의 굵직한 행사에서 종종 사회를 보았다. 그의 유머는 사람들을 쉽게 질리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글라슈트 팀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유람선의 천장이 2미터가 조금 넘어서 그런지 1미터 95센티미터의 글라슈트가 들어오자 우람해 보였다. 30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로 짓누르는 느낌이 배 바닥에 전해졌다.

"MBC-TV 과학기술팀 조기문 기자입니다. 글라슈트는 파워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격투로봇치고는 키도 작고 가볍습니다. 결승전에서 혹시 졸리 더 퀸처럼 내동댕이쳐지는 건 아닌지 걱정인데요, 미리 준비해둔 대책이 있나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시다시피, 글라슈트는 지금까지 잘 싸워왔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결승전도 치르게 됐고요. 저희는 여러분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드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너무 걱정마시죠."

볼테르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사라가 말을 이었다.

"글라슈트는 알파 모터와 베타 모터가 263개나 달린 매우 유연한 로봇입니다. 눈과 무릎 등에 부착된 4대의 카메라는 0.001초마다 움직이는 물체를 파악하여 실시간으로 대응 동작을 조절하구요. 하체는 무려 5G의 압력에도 버팁니다. 저희 글라슈트는 빠른 공격에 유난히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하, 글라슈트가 빠른 공격에 유난히 강하다고요? 재미있는 반어법이네요. 글라슈트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격을 맞으면서 버텨냈습니다. '맷집의 격투'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결승전에서도 얼마나 얻어터지다가 더러운 공격을 해댈지 저희도 걱정이 많습니다."

무사시를 개발한 리우데자네이루 로봇아트센터 소속 로봇공학자 히로유키 나카지마가 자리에 앉자마자 최볼테르 일행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뭐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 무사시가 상대 로봇을 영원히 고물로 만들어버린 경기가 무려 다섯 번이지. 여섯 번째 희생양이 되기 싫으면, 이번엔 지저분한 행동 하지 말라고. 우리 무사시도 지저분한 공격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로봇이니까."

휘잉!

글라슈트의 팔이 갑자기 뻗치더니 탁자 위 물컵들과 자료들을 내동댕이쳤다.

베를린 로봇연구소와 리우데자네이루 로봇아트센터 멤버로 짜인 무사시 팀은 지난 몇 년간 동경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동경 본부의 대장인 히로유키 나카지마는 유난히 상대편 비위를 건드리는 발언에 능했다. 로봇MC 남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히로 박사님, 무사시는 원래 펀치가 좋은 로봇인데요. 지난 번 경기를 보니 정말 팔의 근력은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 비결이 뭡니까?"

"저희는 몇 달 전, 글라슈트와 <보노보> 개국 기념 평가전을 치른 바 있습니다. 그때 글라슈트의 목을 완전히 부러뜨리지 못해 아쉬웠는데요……."

"아니, 제 질문은 그게 아니라……."

"네, 압니다. 저희는 혼다에서 개발한 초강력 합금을 두 팔 스킨에 장착했고, 캠리 6 자동차 엔진을 변형시켜 어깨에 달았습니다. 그래서 무사시의 펀치는 세계 최고지요. 저는 이번 결승전에서 글라슈트의 데스 시그널을 듣기 전에 반드시 녀석의 머리통을 박살내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은은한 불빛의 유람선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무사시는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죽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최볼테르도, 노민선도, 서사라도, 모두 화나고 또 두려운 표정이었다. 글라슈트만 아무 표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