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지 2년째 되던 해, 아버지는 매력적인 금발의 우크라이나 이혼녀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의 나이는 여든넷, 그 여자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그녀는 깃털 달린 핑크색 수류탄처럼 우리 가족의 삶을 폭파시켜버렸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에게서 전화로 전해 듣게 된 재혼 소식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사회학 강사인 나데즈다는 머리로 피가 몰린다. “제발 농담이기를!” “어리석은 노인네 같으니!” 등 비난이 튀어나오는 걸 꾹 참고 일단은 태연히 “어머나, 잘됐네요, 아버지”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재혼 상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들이 하나 딸린 우크라이나 여자로, 발렌티나란 원래 이름보다는 비너스란 별칭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비단결 같은 금발에 우월한 가슴을 가졌다는 설명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참으며 질문을 던진다.
“그 여자가 왜 아버지와 결혼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시무룩하면서도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당연히 나도 알고 있지. 여권, 비자, 취업허가증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 그게 어때서?”
이 소설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영국 이민자 가정에서 아버지의 재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영국에 정착하려는 한 젊은 우크라이나 여자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분별력 부족한’ 아버지, 그로 인해 경악하게 된 영악하고 현실적인 두 딸의 고군분투가 유머 있게 녹아들었다.
“짙은 화장-요란한 손톱-큰 가슴 비단결 금발의 36세 이혼녀가 84세 아빠와 결혼한다고? 왜?”
두 딸은 짙게 화장하고 요란한 손톱에, 큰 가슴을 가진 이 무례한 우크라이나 여자를 영국 이민국이 빨리 내쫓아주길 기다리지만 세상이 과거보다 이민자들에게 훨씬 관대해졌다는 것만 깨닫는다.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탐탁지 않은 새어머니를 몇 번 만나보지만 발렌티나는 짧은 영어로도 당당하게 말할 뿐이다. “너 엄마 죽었어. 이제 너 아빠 나와 결혼했어. 너 그거 싫어해? 그래서 말썽부려. 나 알아. 나 바보 아냐.”
이런 와중에 발렌티나의 체류 허가가 번번이 거부되고 그녀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하면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든 아버지와 딸,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자매 나데즈다와 베라, 서로 다른 목적으로 결혼에 합의한 아버지와 발렌티나, 결코 상대에게 호의적일 수 없는 두 딸과 새어머니 발렌티나…. 이들의 뒤엉킨 관계를 통해 작가는 노년의 고독과 이민자들의 현실, 베일에 가려졌던 한 가족의 역사와 화해를 솜씨 좋게 그려냈다.
우크라이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가 2005년 자전적 경험을 반영해 58세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원제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가 틈틈이 집필하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tractors in Ukrainian)’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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