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멀리 나가 혼자 어둑하게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다//당신은 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밤 등대처럼 울지 모르겠으나, 나는//곧장 목포 유달산 밑으로 가서 영란횟집 계산대 앞에 민어 한 마리로 누워 있겠다 벗겨 손질한 껍질 옆에다 소금 종지를 두고 내장을 냄비에 끓여 미나리도 반드시 몇 가닥 얹겠다//혹여 전화하지 마라 올 테면 연분홍 살을 뜨는 칼처럼 오라 바다의 무릉도원에서 딴 복사꽃을 살의 갈피마다 켜켜이 끼워 둘 것이니//때로 살다가 저며내고 발라내야 할 것들 때문에 뼈는 아리지 그래도 오로지 뼈만이 폭풍 속에 화석을 새겨 넣지//그러므로 당신은 울지 마라 소주병처럼 속을 다 비워낸 뒤에야 바닷가 언덕에 서서 호이호이 울어라” <안도현 ‘민어회’ 전문>
한 세상 살다보면, ‘저며내고 발라내야’ 할 일들이 좀 많은가? ‘연분홍 복사꽃 살점 떼어낼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럴 땐 어두컴컴한 동굴에 처박히고 싶다. 제 상처를 핥으며 꺼이꺼이 울고 싶다. 아니다. 아예 땅바닥에 넉장거리로 드러눕고 싶다. 가쁜 숨을 가지런히 하고, 다소곳이 서해 소금밭 옆에 뼈로 남으리라. “자, 이제 나를 회 뜨든, 매운탕 끓이든, 맘대로 하시라!”
왜 하필 민어인가? 왜 민어에만 칼을 대는가? 민어라고 어디 뼈가 아리지 않겠는가? 민어는 맛있다. 맛있는 게 죄이자 업보다. 물컹! 씹히는 살이 부드럽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뭉툭하고 지그시 닿는 느낌이 좋다. 담백하면서도 구수하다. 민어회는 두께두께 썰어야 제맛이다. 목포영란횟집(061-243-7311)이 전국 식도락가들에게 민어회로 유명해진 것도 바로 ‘식칼(?)로 뭉텅뭉텅 썰어준’ 때문이었다. 그만큼 아직도 소박하다.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장 맛도 일품. ‘영란’은 여주인이름을 딴 것이다. 민어회 민어전 민어무침 각각 한 접시 4만5000원.
생선은 붉은살 생선과 흰살 생선이 있다. 붉은살 생선은 보통 등이 푸르다. 그래야 눈 밝은 새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는다. 얕은 바다에서 살기 때문에 바다색깔과 비슷해야 유리하다. 동작도 ‘빠릿빠릿’하고 잽싸다. 고등어 정어리 멸치 참치 꽁치 삼치 연어가 그렇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핏대들이다. 성질이 불같다. 뭍에 나오면 금세 펄펄뛰다가 죽어버린다. 상하기 쉬워 빨리 먹어야 한다. 맛이 진하고 비린내가 강하다. 기름기가 많아 느끼하지만, 고소하다.
흰살 생선은 대부분 깊은 바다에서 산다. 굼뜨다. 조기 광어 대구 명태 가자미 우럭 도미 병어 갈치들이다. 맛이 진하지 않고, 살이 연하다. 씹는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물컹한 것이 두고두고 남는다.
제주에 가면 고등어회가 흔하다. 하지만 고등어회를 먼저 먹으면, 다른 생선회는 맛이 안 난다. 느끼한 맛이 오래 남아 있는 탓이다. 회는 흰살 생선회부터 먹는 게 기본이다.
민어는 흰살 생선이다. 흰살에 연분홍 복사꽃 빛이 감돈다. 산란기인 6∼8월이 제철이다. 민어탕은 임금님 수라상 단골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엔 삼복 복달임으로 첫째 민어탕, 둘째 도미탕, 셋째 보신탕을 쳤다. 복날이 오면 양반은 민어탕을, 상놈은 시냇가에 모여 보신탕을 즐겼다. 민어탕은 쑥갓 애호박 미나리 팽이버섯 등에다가 고추장을 풀어 끓인다. 참기름 등 강한 양념을 넣으면 고유 맛이 사라진다. 맛이 깊고 담백하다. 뜨거울 때 먹어야 노란 기름이 굳지 않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서울 서초동 국제전자센터건너편 삼학도(02-584-4700·지하철3호선 남부터미널역 2번 출구)는 27년째 민어전문집이다. 목포 출신의 손일랑 사장(67)은 전남 무안 앞바다에서 잡힌 민어만을 고집한다. 민어탕 1만8000원, 민어회 한 접시 5만5000원. 서울 논현동 리츠칼튼호텔 건너편 먹자골목에 있는 노들강(02-517-6044)도 이름났다. 민어회 2인 기준 한 접시 5만 원, 민어탕 2인 기준 3만5000원.
삼학도 손 사장은 말한다. “임자도나 지도 부근에서 잡힌 게 으뜸이다. 중국산이나 양식민어는 감히 맛을 따질 계제가 못 된다. 요즘엔 잡히는 양이 적어 1kg에 5만∼5만5000원이나 간다. 우리 집에선 무안 앞바다에서 민어가 잡히지 않으면 안 판다. 민어는 최소 5kg은 넘어야 맛이 나는데, 수컷은 15kg쯤 되면 75만∼80만원 간다고 보면 된다. 암컷은 수컷에 비해 1kg에 1만5000∼2만 원 정도 싸다. 수컷이 기름이 자르르 올라 맛있는데, 그중에서도 뱃살이 으뜸이다. 암컷은 알을 낳기 때문에 맛이 덜하다.”
민어는 못 먹는 게 없다. 펄펄 뛰는 활어보다는 어느 정도 숙성된 선어(鮮魚·냉장된 것)가 맛있다. 뱃살은 기름기가 있어 쫄깃하고 구수하다. 회는 된장에 찍어 먹거나 묵은지에 싸 먹는다. 껍데기는 살짝 데쳐 참기름소금장에 찍어 먹는다. 쫄깃하다. 부레나 지느러미도 맛있다. 민어알은 ‘봄 숭어알, 여름 민어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란으로 최고다. 참기름을 몇 번이고 발라가며 그늘에서 말린다.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다. 침이 괸다.
민어부레는 워낙 쫀득해서 풀같이 끓여, 국궁 활이나 자개장을 만들 때 접착제로 쓰기도 했다. 생김새는 소의 등골이나 지라 비슷하다. 소금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한 데다 쫀득하고 쫄깃하다. 부레 속에 소를 채워 찜을 한 어교순대도 황홀하다. 오이 두부 쇠고기 따위를 소로 박는다.
TV드라마 ‘식객’에서 최고의 숙수를 뽑는 첫 번째 시험문제가 바로 ‘민어부레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숙수는 민어부레회덮밥(쫄깃하고 감칠맛)을 내놓았고, 두 번째 숙수는 민어부레석류탕(깊고 단맛)을 선보였다. 하지만 으뜸상은 성게알과 함초로 부레 속을 채운 민어부레성게알함초 요리가 차지했다. 한마디로 ‘입 안에 바다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민어회 민어탕 민어회무침 민어구이 민어전 민어아가미무침 민어뼈다짐…. 민어는 예부터 상류층이 즐긴 고급 요리다. 그런데 왜 백성 ‘민(民)’자가 들어간 민어(民魚)일까? 그것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짜 내는 것은 평민들이지만, 막상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귀족들인 것과 같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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