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프랑스의 고교 철학 교사인 저자가 걷기의 철학적 의미를 살폈다. 저자는 우선 과거만큼 걷지 않는 현실을 개탄한다. 인류는 걷기를 통해 자연과 일체감을 유지해왔는데 탈것의 발달로 덜 걷게 됨으로써 일체감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발걸음에 맞춰진 세계를 되찾아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다시금 우리 행성을 측량하는 것, 즉 땅 위를 걷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느리게 걷는 행위가 되돌려주는 기쁨도 강조한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섬세한 부분이 느린 움직임을 통해 드러난다. 걷기는 느린 움직임이며, 이 점에서 세상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보게 해준다.”
걷기를 통해 이런 기쁨을 얻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산행(山行)을 예로 든다. 걷다 보면 좌절감, 피로, 고통이 밀려온다. 멈추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면 이런 유혹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피로는 의지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고 저자는 말한다.
산행이 목표를 정한 걷기라면 산책은 우연에 내맡긴 걷기다. 산책자는 단지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이끌리는 대로 향하고 뚜렷한 목표 없이 거닌다. 그 과정에서 산책은 사유로 연결된다. 저자는 “시속 3∼5km 속도로 이동하면서 세상의 크기와 현실에 대해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과거 철학자들 가운데는 걸으며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그리스어 페리파테인(peripatein)은 ‘산책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파생된 페리파토스는 ‘산책하며 철학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걸으면서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소요(逍遙)철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다”라고 말한 루소는 1762년 프랑스의 진보적 정치인 말제르브에게 쓴 편지에서 숲을 산책하고 난 뒤의 느낌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머리는 다소 피곤하지만 마음은 기쁜 채, 나는 잔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사물들이 주는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며,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고, 평온과 내 행복한 상황을 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즐겁게 휴식을 취했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스위스의 실바플라나 호수, 이탈리아의 제노아 인근 라팔로 만 주위를 산책할 때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발상이 떠올랐다”고 밝혔다. 몽테뉴는 ‘세 가지 사귐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은거할 곳에는 꼭 산책장이 있어야 한다. 앉아 있으면 사유는 잠들어버린다. 다리를 흔들어놓지 않으면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수필가 에밀 시오랑이 1965년 10월 11일자에 기록한 메모에는 산책을 통해 얻은 기쁨이 가득하다. “일요일인 어제 나는 리옹 숲 기슭을 20km도 넘게, 주로 아름다운 로브르리 골짜기 안에서 걸었다. 오늘 내 안에는 철학에 대한 도취와 열광이 충만하다. 뇌는 근육을 움직일 때에만 작동한다. 언젠가 보행론을 써봐야겠다.”
그러나 ‘시간이 돈’이 된 지금, 사람들은 옛날만큼 걷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이를 개탄한다. “아, 옛 시절의 한량들은 어디에 있는가. 민요에 나오는 게으른 인물들은,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고 총총한 별빛 아래서 잠자던 떠돌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