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종… 지도자 세종… 세종을 다시 보다

  • 입력 2009년 7월 30일 03시 00분


내달 1일 개장할 광화문광장의 한가운데에는 세종대왕이 자리한다. 광장 개장을 즈음해 국가의 상징으로 부상할 세종대왕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광장에 설치될 세종대왕 좌상(坐像) 점토 모형(위)과 동상 주변 조감도.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내달 1일 개장할 광화문광장의 한가운데에는 세종대왕이 자리한다. 광장 개장을 즈음해 국가의 상징으로 부상할 세종대왕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광장에 설치될 세종대왕 좌상(坐像) 점토 모형(위)과 동상 주변 조감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세종대왕이 부활하고 있다. 내달 1일 문을 여는 서울 광화문광장의 주인공은 단연 세종이다. 한글날 모습을 드러낼 세종대왕의 좌상(坐像)은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인 세종로 한복판에 자리함으로써 국가 상징으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때를 맞춰 8월 말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세종의 국가 경영 방식에 초점을 맞춘 시민강좌가 열린다. 학계의 세종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업적 중심에서 2000년대 들어 통솔력에 초점을 맞춘 ‘지도자 세종’으로 옮겨가고 있다.》

내달 광화문광장 개장 맞춰 ‘세종 리더십’조명 활발
국제학술대회-시민강좌 등 10월까지 잇달아 열려

○ 세종로의 주인으로 돌아오는 세종

세종로 사거리∼광화문 구간의 세종로에는 지금까지 ‘세종’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에 들어서는 세종대왕의 좌상은 가로 세로 각 5m, 높이 6.2m로 덕수궁 안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규모의 2배. 높이 3.3m, 가로 11.5m, 세로 9.2m인 기단의 규모까지 고려하면 웅장한 모습이다. 위치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북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으로 정해졌다.

세종은 그곳에서 남향으로 앉는다. 좌상 앞에는 세종시대 주요 발명품인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의 조형물이 자리한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공간이 될 광화문광장에서 세종은 이렇게 창의와 애민(愛民)을 상징하게 됐다.

세종의 정확한 생가 터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 중이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97년 5월 5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저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는 세종로의 북쪽 인근인 종로구 통의동에 ‘이 근방에서 태어났다’는 표지석만 설치돼 있다. 서울시는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세종시대 도성 공간구조에 관한 학술연구’를 통해 생가 터를 찾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세종의 능이 있는 경기 여주군에서는 왕릉 부근 군유지 20만 m²에 박물관, 어학당, 전시관, 공연장, 교육연수원을 갖춘 ‘세종나라’ 건립을 추진 중이다.

8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매주 월요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세종의 국가경영 스타일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 ‘세종실록학교’가 열린다. ‘인간 세종, 그는 누구인가’를 비롯해 세종의 인재경영과 창조경영, 위기경영을 주제로 총 15개의 강좌를 개최한다. 또 세종대왕의 동상 제막식이 열릴 10월 9일 한글날에는 ‘세종학 국제학술대회’도 예정돼 있다.

○ 소통과 인재를 중시한 세종

세종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은 최근 ‘지도자로서의 세종’에 쏠리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광복 이후 세종에 대한 논문과 저서 552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초기에는 어문과 한글 등에 관한 연구가 주를 이뤘다가 2000년 이후에는 세종의 지도력에 대한 연구가 많아졌다. 업적 그 자체보다 국가를 융성하게 만든 비결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고려 왕조에 충성하는 인재가 여전히 많았던 시기였기에 세종이 생각한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재 등용이었다. 간택(揀擇), 평론(評論), 중의(衆議)라는 3단계의 체계를 갖추고 인재를 썼다. 인사담당자가 후보자의 경력과 자질, 부패 혐의는 물론 가족관계까지 살펴 정밀하게 간택하게 했다. 이후 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모여 평론에 평론을 거듭해 더 나은 적임자는 없는지를 꼼꼼히 따졌다. 마지막으로 여론을 들었다. 이조 내부에서 적합 판정을 받았더라도 조정 안팎의 여론이 좋지 않으면 쓰지 않았다. 세종실록에는 “중의가 합한 연후에야 임명토록 했다”고 기록돼 있다. 지도자로서의 세종은 국민과 소통하며 신뢰를 쌓는 왕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들판을 지나갈 때는 일산(日傘·왕가의 행차 때 받치던 큰 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고 벼가 잘 되지 않은 곳에서는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다. 농사가 여의치 않은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곤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박현모 연구실장은 “한글 창제와 같은 위대한 업적은 지도자로서 세종이 가진 능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세종이 가지는 상징성은 ‘한국의 미래’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