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태양왕’ 이미지는 스스로 만든 것”

  • 입력 2009년 8월 3일 02시 55분


■ 이영림 교수 새 연구서 출간
“특혜 받은 당대의 문인들
작품서 위대한 왕으로 묘사”

“루이 14세의 정치선전 전략은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현대 정치인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사실 그는 기존 귀족세력을 굴복시킨 절대군주라기보다는 귀족과의 타협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죠.”

태양왕이라 불린 17세기 프랑스의 군주 루이 14세(사진). 10년 넘게 루이 14세를 연구해온 이영림 수원대 사학과 교수가 당시의 프랑스 정치·사회상에 관한 ‘루이 14세는 없다’(푸른역사)를 최근 출간했다.

이 교수는 이 책에서 루이 14세 시대에 대해 “루이 14세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는 기존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며 “오히려 귀족들에게 면세특권과 관직을 주는 대신 충성을 확보하는 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루이 14세가 강력한 군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탁월한 정치선전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1663년 설립된 ‘소학술원’은 왕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메달과 조각을 구상하는 곳이었다. 루이 14세에게 연금을 받은 몰리에르와 라신 등 당대 문인들은 작품을 통해 루이 14세를 아폴론이나 알렉산더 대왕에 비유했다.

베르사유 궁전 역시 절대군주 루이 14세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 교수는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일상생활을 조직화, 체계화한 궁정예절을 만든 뒤 귀족들이 그 예절을 따라하도록 했다”며 “궁정예절은 곧 복종의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양왕 루이 14세의 신화는 ‘위대한 프랑스’ 건설이 과제였던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다시 한번 강화됐다.

이 교수가 루이 14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7년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당시 논문 주제는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인 1648년 귀족들이 일으킨 프롱드난에 관한 것이었다. 이 교수는 “반란이 끝난 뒤 10년도 지나지 않은 1661년,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혼란이 한순간에 정리되고 절대군주제가 시작됐다는 데 의문을 느꼈다”며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루이 14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관심은 2005년 논문 ‘루이 14세는 과연 절대군주였나?’ 등으로 이어졌다.

이 교수는 최근 루이 14세 시대 직후인 17, 18세기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엄격한 윤리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던 얀센주의와 당시 계몽주의의 연관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이 교수는 “루이 14세 시대는 앙시앙 레짐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프랑스혁명의 배경이 된다”며 “루이 14세를 이해해야 근대 유럽의 형성을 이해할 바탕이 생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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