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2>

  • 입력 2009년 8월 5일 14시 16분


진열장 너머 공간은 별세계였다.

앨리스가 말꼬리와 격전을 벌인 곳이 낡은 진열장과 먼지 풀풀 날리는 박제 짐승들, 그리고 수많은 두개골로 을씨년스런 20세기 초 느낌을 주었다면, 진열장 틈으로 들어선 공간은 최신 의료 설비로 가득했다.

대뇌의 공간좌표를 지정해주는 스테레오텍식 프레임(Stereotaxic frame)에서부터 신경세포의 활동을 측정하는 '자동 패치-클램프' 장치, 세광자 현미경 (three-photon microscope), 로봇 지능제어 플랫폼 등이 잘 정돈돼 있었다. 플러그는 전원에 꼽혀 있었고 실험 테이블 위엔 패트리디쉬가 널브러져 있었다. 최근까지도 사용했던 모양이다.

수술대 아래에는 최신 시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직사각형 관이 아니라 중세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 누워 있을 법한 윤이 나는 검은 관이었다.

앨리스는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왼손 하나로 관 뚜껑을 힘껏 밀었다.

삐거억.

소리를 내며 관 뚜껑이 열리자 검은 팔이 보였다. 사라의 팔이었다. 앨리스는 급히 관 뚜껑을 확 열어젖혔다. 사라는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사자머리가 몽땅 잘려나간 탓에 검은 비구니처럼 보였다. 관 바닥에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사라 씨!"

앨리스가 사라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차가웠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중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저체온증으로 목숨이 위태롭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사라를 업으려고 했다. 앨리스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으니, 그녀를 안거나 부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라의 상체를 당겨 세워 관에 기대게 한 후, 앨리스는 자신의 등과 엉덩이를 최대한 사라의 가슴에 배에 갖다 댔다. 그리고 왼팔로 사라의 왼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앞가슴까지 당기면서 일어섰다. 균형을 잃은 몸이 왼쪽으로 기우뚱 흔들렸다. 겨우 몸을 돌려 사라의 등을 벽에 다시 붙인 후 깊은 숨을 한 번 두 번 세 번 몰아쉬었다. 그리고 사라가 들리든 말든 이야기했다.

"사라 씨! 견뎌야 해요. 곧 병원으로 갈 테니까.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정신 차려요. 알았죠?"

그리고 앨리스는 끙! 힘을 모은 후 열린 진열장 틈을 통해 다시 낡은 세계로 넘어왔다. 쓰러진 말꼬리를 흘끔 살핀 후 피 묻은 바닥을 피해 반원을 그리며 출구 쪽으로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펄쩍펄쩍 내달리고 싶었지만 서두르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져 발이라도 삐면 큰 낭패다. 걷기만 해도, 말꼬리와 싸우느라 힘껏 찍어 올린 무릎이 계속 떨려왔다. 아무래도 무릎 관절이 상당 부분 망가진 듯했다.

열린 문으로 통나무집을 나왔다.

세 걸음 더 걷다가 앨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려, 있다. 처음부터 열려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가 등 뒤로 닫은 기억이 났고, 그 기억을 따라 차디찬 기운이 머리끝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자살한 말꼬리가 문을 닫았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있다. 누군가 말꼬리와 나와의 혈투를, 내가 사라를 힘겹게 업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본 것이다. 그가 내 편일 리 없다. 그렇다면, 목숨이 끊긴 말꼬리의 편이다. 말꼬리의 편이라면, 그처럼 사람 죽이는 일쯤은 쉽게 생각하는 족속이리라. 그리고 당연히 날 죽이려 들겠지. 내가 그라면 언제 어디서 공격을 시작할까? 내가 그라면…… 바로 지금이지!

앨리스가 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지붕에서 작은 사내가 날아 내렸다. 앨리스의 어깨에 가볍게 올라타자마자, 그는 자신의 이마로 그녀의 이마를 연이어 두드렸다.

"아악!"

차돌보다 단단한 머리였다. 이마 속에 강철판을 깔아 넣었는지도 몰랐다. 지독한 통증이 밀려들면서 정신이 가물거렸고 왼팔에 힘이 빠졌다. 그 바람에 사라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뒤이어 앨리스도 사라의 가슴에 뒤통수를 부딪치며 쓰러졌다.

앨리스의 흐릿한 시선에 하늘에서 날아 내린 사내의 엉덩이가 보였다. 반쯤 떨어져나간 원숭이 꼬리가 우습고 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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