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처절한 비극으로 재탄생한 ‘욕망의 2중주’… ‘갈매기’

  • 입력 2009년 8월 6일 02시 57분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대표와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만남은 예정된 것일지 모른다. 사실주의 작가인 체호프의 작품에선 영웅적 주인공은 사라지고 일상에 치여 전락(轉落)하는 인물만 등장한다. 골목길의 작품들은 골목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일상의 편린에서 비범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골목길이 체호프의 ‘갈매기(사진)’를 무대에 올린 것에 대한 연극계의 관심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19세기 제정러시아 말 귀족의 무료한 일상의 이면에 감춰진 윤리적 갈등을 그린 체호프의 작품이, 21세기 힘겨운 서민들의 서늘한 삶의 이면을 포착해온 박근형 표 연출과 과연 어떻게 만날 것인가.

박근형의 ‘갈매기’는 남녀 주인공인 트레플레프(김주완)와 니나(장영남·정진아)를 두 축으로 삼아, 모방을 통해 확장되는 욕망의 이중주에 집중한다. 작가 지망생인 트레플레프는 어머니 아르카지나(서이숙)의 연인인 트리고린(김영필) 같은 작가가 되는 게 목표다. 반면 니나는 아르카지나와 같은 여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런 니나에게 트리고린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수 있는 매력적 대체물이다. 니나가 자신을 사랑하는 트레플레프를 버리고 트리고린을 택하는 것은 곧 자신이 열망하는 아르카지나가 되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개의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트리고린을 가운데 둔 니나와 아르카지나의 삼각관계와, 니나를 가운데 둔 트레플레프와 트리고린의 삼각관계다. 둘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트리고린의 위치를 열망하던 트레플레프는 니나가 트리고린을 사랑하는 것을 안 순간 트리고린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오른다. 니나를 유혹하는 트리고린의 무의식에는 그녀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트레플레프의 연인이란 점이 작동하고 있다. 둘은 니나라는 욕망 매개체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욕망의 짝패’다.

니나와 아르카지나 역시 트린고린을 매개로 삼은 욕망의 짝패다. 그러나 그들에게 트리고린은 상실의 두려움보다 생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트리고린의 변심을 눈치 챈 아르카지나가 펼치는 깊은 입맞춤이 이를 상징한다.

이런 차이는 삼류배우로 전락한 니나와 작가로 성공한 트레플레프의 해후 장면에서 뚜렷해진다. 니나는 몰락했지만 트리고린이란 욕망의 대상을 포기하지 않기에 비루한 삶을 견딜 수 있다. 반면 트레플레프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니나를 붙잡을 수 없다는 상실감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다.

원작에선 트레플레프만 죽는다. 골목길의 ‘갈매기’에선 그의 늙은 삼촌 소린(박정순)과 트레플레프를 짝사랑하던 마샤(정세라)가 함께 죽는다. 셋은 모두 욕망의 대상을 소진한 채 ‘타버린 재’가 돼버린 삶을 견뎌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갈매기가 물을 떠나선 살 수 없듯 우리 역시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는 점을 한층 더 비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체호프는 이 작품을 코미디로 규정했지만 박근형에겐 처절한 비극인 셈이다. 배우들의 열연에 비해 너무 소박한 무대세트가 아쉽다.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게릴라극장. 02-763-126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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