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1880∼1936)의 아내이자 간호사로 독립운동을 이끈 박자혜(1895∼1943)는 낯선 이름이다. MBC는 다큐멘터리 ‘독립운동, 그 절반의 이름 박자혜’(11일 밤 12시 25분)에서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를 조명한다.
지난달 15일 충북 청원에선 박자혜의 사후 66년 만에 처음으로 추모제가 열렸다. 며느리 이덕남 씨는 “이제 시어머니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박자혜의 인생은 숨겨진 우리의 독립운동사, 그 절반의 그늘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밝혔다.
박자혜는 숙명여학교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거쳐 1916년부터 1919년 초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의료진 대부분이 일본인이던 시절, 그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전문직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박자혜는 만세운동으로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울분을 참지 못했다. 간호사들로 구성한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어 간호사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고 만세운동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박자혜는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일본경찰이 그를 ‘악질적이고 포악한 여자’라고 보고서에 기록할 정도로 기개를 보였다. 갖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박자혜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중국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신채호와 만나 결혼한다.
베이징에서 2년간 짧은 신혼생활을 보낸 뒤 지독한 가난 때문에 1923년 귀국했다. 그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69번지에서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걸고 수범, 두범 두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신채호가 보낸 항일열사들의 독립운동을 목숨을 걸고 도왔다. 박자혜는 베이징, 톈진 일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 인사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6년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 때는 길 안내를 했다. 황해도 출신인 나석주는 당시 서울 방문이 처음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베이징의 신혼집, 인사동의 조산원을 찾아가고, 당시 생활과 활약상을 재현해 보여주며 며느리, 세상을 떠난 아들의 지인, 단재 연구자 등의 회고를 전한다. 내레이션은 가수 JK김동욱이 맡았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