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인 하인두(1930∼1989)의 그림과 조우할 기회가 생겼다. 18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02-736-1020)에서 열리는 ‘하인두 20주기 기념 가족전’. 전시의 또 다른 의미는 부인 류민자 씨를 비롯한 가족의 작업이 어우러진다는 점. 하 화백의 대작 유화 20여 점과 더불어 부인(동양화), 딸 하태임(서양화), 아들 하태범(조각), 사위 강영길 씨가 층별로 개인전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오색(五色) 동행’이란 부제처럼 예술의 길을 걷는 가족의 작품에서는 공통분모의 흔적과 다양함이 동시에 발견된다.
하인두 화백은 한국적 추상미술을 추구한 독보적 색채화가로 평가받는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비구상) 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동시대 화가들이 단색조 작품을 선호할 때 빨강 파랑 등 강렬한 원색이 맥동하는 작품을 고집했다. 감정이 제거된 ‘냉혹한 그림’은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화단에서 백안시되기도 했으나 ‘우리의 근원적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자신의 철학을 꺾지 않았다.
그 결실이 바로 ‘생명에의 외경’이란 깨달음을 우리의 고대문화를 지배했던 눈부신 색채로 녹여낸 후기 작업에 담겨 있다. 불교적 우주관에 관심을 갖고 이를 오방색의 만다라 시스템으로 표현한 그림은 기하학적 문양과 구심을 향해 응집하는 형태로 요약된다. 말년의 ‘혼불’ 연작에선 암 투병 중에도 생명과 그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은 화가의 강인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5일 열린 전시개막식에선 미술계 인사 100여 명이 모여 ‘인간에 대한 신뢰감과 사랑을 가졌던 후덕한 성품의 화가’를 한마음으로 그리워했다. 이날 받은 도록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많은 동세대 작가들이 알게 모르게 서구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내달았을 때, 그만이 단신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곳으로 달려갔다. 분명히 그는 역주행했다.’ 그 역주행 덕에 한국 미술은 훨씬 풍성해졌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