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야기를 믿었다. 그때는 누군가 죽으면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것 같다. 죽음은 곧 사라짐이었기에 그 사라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의 감성에는 ‘죽으면 별이 된다’는 감언이설이 먹혔다. 게다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환상은 꽤나 달콤했다. 그때만 해도 밤하늘에는 별들이 북적였고, 별은 아이의 눈에 무척 어여쁜 존재였다. 저렇게 반짝이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언젠가 죽어도 그렇게 억울하진 않겠다 싶었다.
10대에는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들에 매혹되었다. 견우와 직녀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의 숨겨진 이야기, 지상에서는 함께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곰자리가 된 칼리스토…. 별자리에 얽힌 신화들은 흥미진진했다. 내가 열광한 별자리 이야기는 지구에서 미처 삶의 터전을 이루지 못한 존재들의 피난처가 밤하늘이 되는 이야기였다. 삶이라는 사각의 링에서 밀려난 자들의 아름다운 패자부활전, 그것이 밤마다 펼쳐지는 별자리 쇼였다.
20대에는 별자리 운세에 홀렸다. 내가 속한 별자리와 나의 운명을 연결짓는 그 알레고리적 사유가 마음에 꼭 들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미래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든 것이 불안했다. 한때는 별의 시차가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별빛이 수만 광년을 거쳐 지구에 도달한 것일 수 있으니, 지금 보이는 저 별은 이미 우주에서 사라진 별일 수도 있다는 생각. 별들의 광대무변한 우주여행은 이토록 복작거리는 삶의 투쟁이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안도감을 선사해 주었다. 내가 아무리 사고를 쳐봤자 우주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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