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현기영 지음/300쪽·1만 원·창비
제주도4·3사건을 다룬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 선 굵은 작품들로 현대사의 이면을 조명해온 소설가 현기영 씨(사진)가 10년 만에 장편소설을 펴냈다. 소비사회의 중핵이 돼버린 386세대를 통해 2000년대 한국사회의 세태를 비판한 ‘누란’이다.
13일 오전 작가를 만났다. 그는 “절실히 하고 싶은 이야기여서 작품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까지 내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다룬 ‘불편한 소설’이라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주인공인 허무성은 ‘386 운동권의 막내 학번’이다. 학생운동을 하다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한다. ‘변절자’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는 동료들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고문한 김일강의 주선으로 일본유학을 하고, 귀국 후엔 대학에서 역사 강의를 맡는다. 그러나 고문당한 기억과 배신의 죄책감은 평생 그를 옥죄는 고통으로 남는다. 결국 그는 시대가 바뀌면서 유능한 정치인으로 변신한 고문자, 권력욕에 사로잡히거나 몰락해버린 동료들, 과거를 망각한 새로운 세대 틈에서 방황하게 된다.
작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거리로 몰려나온 군중이 작품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새로운 애국주의’ 등으로만 표현됐던 당시의 군중에 대해 작가는 다른 종류의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소비만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비판이 결여된 군중을 본 것이다. 작가는 “군중, 배신, 파시즘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며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물신주의 사회의 명제가 데카르트의 본래 명제인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되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작품 제목인 ‘누란’은 한때 융성했으나 모래 폭풍에 시달리다 사라진 고대 왕국의 이름에서 따왔다. 작가는 “이 시대에 대한 비관을 말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며 “무작정 앞으로만 질주하는 세태, 성찰 없는 사회에 대한 나의 절망감을 그대로 나타냈다. 과거를 ‘이미 소비해버린 것’으로만 여기는 젊은 독자들이 관심을 갖고 읽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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