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타이밍을 알려주는 1루수
권태주의자가 되고싶은 청년 등
非상식-非주류들의 기이한 인생
만년 꼴찌 팀의 야구 선수가 은퇴를 선언하며 팬들에게 글을 남긴다. 20여 년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과 팀원들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던 선수다. 그런 그가 은퇴하려는 이유는 감독이 1루 수비를 그만두게 해서다. 왜 그토록 1루에 애착을 가졌을까. 상대편 선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 선수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며 그라운드에 선 외로움을 잊는다. 프로에 적응하지 못한 신인 선수나 부진에 허덕이는 선수가 오면 팀의 수비전략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적극적으로 도루를 권하고 타이밍을 알려주기도 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 것, 그는 이것을 ‘야구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소설가 김도언 씨의 신작 소설집 ‘랑의 사태’에 수록된 단편 ‘전무후무한 퍼스트베이스맨’이다.
절충도, 양보도, 타협도 없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 등장한 ‘휴머니즘’이 난데없다. 화자는 “견제 당해 아웃된 선수를 지켜보는 선수 어머니의 마음, 애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야구의 휴머니즘을 부정하는 플레이”라고 주장한다.
승부의 세계가 야구장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승자독식의 사회를 살면서 상대에게 연민과 측은함을 가진다는 건 때로 ‘야구의 휴머니즘’처럼 뜬금없이 여겨질 수 있다. 이 선수의 주장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마음 짠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이들이 야구장에서든 사회에서든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사회 통념에 비춰 비주류이거나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을 이번 소설집의 전면에 내세웠다.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씨름하거나, 경쟁에서 본의든 타의든 탈락하고 밀려난 이들의 범상치 않은 삶이다. ‘권태주의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청년, 체벌로 문제를 일으켜 해직된 교사, 절필한 소설가, 만년 시간강사, 병에 걸린 가난한 시인 등이 연이어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우리가 상식적인 삶이라고 믿어온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
표제작 ‘랑의 사태’에서 작가는 모텔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홀로 오는 남자 투숙객들에게 가끔씩 몸을 내주는 랑이란 여인을 등장시킨다. 부모님이 살아 있지만 이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마음대로 상상하는 이 이상한 여인은 부패하거나 썩어가는 것들에 저항하기 위해 어느 날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내 생애 최고의 연인’은 출판사 편집장인 여성 화자가 주인공이다. 무례하고 이기적인 연하 일러스트레이터의 매력에 반해 사랑에 빠진 그녀는 미혼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사실은 뇌성마비의 아내를 5년간 한결같이 보살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담은 작품들도 보인다. 1950년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흡수 병합했다는 가정하에서 한 소설가의 삶을 기술한 ‘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연보’, 소설가와 일가족의 에피소드들을 세밀히 다룬 ‘다큐멘터리 가족극장’ 등이 수록됐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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