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총독’ 맥아더, 왜 천황을 껴안았나

  • 입력 2009년 8월 15일 02시 56분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 외상이 맥아더 장군(마이크 앞)과 미국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이날 항복문서 조인식에 일왕은 참석하지 않았다. AP 자료 사진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 외상이 맥아더 장군(마이크 앞)과 미국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이날 항복문서 조인식에 일왕은 참석하지 않았다. AP 자료 사진
◇패배를 껴안고/존 다우어 지음·최은석 옮김/860쪽·4만5000원·민음사

《‘왜 일본은 독일과 달리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일본 분석서다. 미국 역사학자가 쓴 이 책의 시대적 초점은 일본이 미군의 지배를 받던 1945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다. 한국이 광복의 기쁨과 6·25전쟁의 아픔을 겪던 바로 그 시기다. 저자는 황폐한 터전에서 광기와 혼란을 경험한 일본인들의 의식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전후 시기가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효과적 통치 위해 전쟁책임 면죄부
일반 국민들도 죄의식 무뎌져

기존 관료조직도 그대로 이용
‘재무장’ 등 戰後 일본 보수화

○ 죄를 잊다

1947년 12월 도쿄 전범 재판 판결이 내려지기 약 1년 전 일본 대중 월간지 ‘반’에는 여론의 변덕을 비꼬는 글이 실렸다.

“우리는 전범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전쟁 선동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을 박수갈채로 맞았고, 실각했을 때는 남들이 하는 대로 침을 뱉었으며, 이제는 그들의 존재조차 잊고 지낸다.” 전쟁의 책임 의식에 대한 태만을 비난한 것이다.

가능하면 잊고 싶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패전 직후 몇 년에 걸쳐 A급 전범들마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사회로 복귀했다. 심지어 유죄판결을 받은 전범들이 희생자로 인식돼 형무소에서 가장 쾌적하고 유쾌한 생활을 영위했다. 전범 수용소인 스가모 구치소에서는 1952년에는 한 해에만 무려 114회의 유명 연예인 및 예술단의 위로 공연이 있었다.

저자는 독일이 철저하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반면 일본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연유를 당시 일본을 지배했던 맥아더 군정에서 찾았다. 미국이 일왕(천황)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전쟁 책임을 부정함으로써 그 이하 일본인들의 죄의식이 무뎌졌다는 분석이다. 일왕이 책임지지 않는데 그를 떠받들던 ‘신민(臣民)’들이 크게 죄의식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미국인들이 조선과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인들의 피해에 무관심했던 것도 일본의 죄의식 부재와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이후 냉전시대를 맞아 중국이 적국이 되자 미국은 정책적으로 난징대학살과 같은 일본의 잔혹행위를 들추는 것을 멈추었다.

○ 군정의 민주주의 이식 실패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재건의 기초를 닦았다’는 시각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1945년 8월이 일본의 군국주의와 민주주의 분수령이지만 전후 일본이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미군정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해소하고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점령했지만 이는 정복자의 자아도취적인 꿈일 뿐이라고 말한다. 미군정은 언어 소통이 되지 않는 일본과 일본인을 지배하기 위해 기존 관료 조직을 이용한 간접통치를 내세움으로써 오히려 토착 관료사회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맥아더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일왕을 보호하고 이용하면서 ‘관료제 민주주의’나 ‘일왕제 민주주의’ 같은 자가당착적인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냉전의 동맹국으로서의 필요성 때문에 미국은 결국 자신들이 만든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일본을 재무장하고 자유주의적인 요소를 줄임으로써 일본을 보수주의적인 전후국가로 자리 잡게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 대중의 다양한 욕구 분출

저자는 패전 이후 일본의 사회상을 통해 오늘의 일본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도 고찰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하던 순간, 많은 일본인은 신민으로서 왕을 보좌하지 못한 죄의식에 몸을 떨었지만 그런 의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자신의 남편이 자결을 하지 않고 살아 돌아오기를 빌었고, 처참한 전쟁이 끝난 것에 안도했다. 패전의 허탈함이 사회를 휩쓸자 수천 명의 단체 맞선이 유행하고, 퇴폐문화가 꽃을 피운다. 일본 정부가 미군 접대 매춘부의 모집을 공식 지원하기도 했다.

사회의 역동성도 강했다. 제국의 억압적 통제가 사라진 공간에서 일본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했고, 노동운동에 대한 지지도 폭발적이었다. 출판사들은 싸구려 대중잡지부터 통찰력 가득 찬 비평지를 번역·출판하며 문자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국가가 강요하던 공중도덕을 대신해 개인 취향에 대한 애착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저자는 패전 후 일본인들의 이런 활력이 지금까지 과소평가돼 왔다고 주장하며 대중의 활기찬 에너지가 일본의 성장에 중요한 발판이 됐음을 시사한다.

전후 일본의 다양한 양상을 세밀하게 고찰한 저자는 오늘날 일본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신민족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다시 과거의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일본이 패전과 그 이후의 경험에서 스스로 무엇을 배웠는지가 관건이다.”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말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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