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년역 민영기씨 “단순한 반일감정 넘어서 따뜻한 일본인들도 부각”
日연인역 기사키 히나노 “두 남녀 비극적 사랑 통해 반전 공감대 확산시킬것”
2004년 3월 28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숨진 한 재일교포의 죽음을 전했다. 1944년 강제 징용돼 동남아 전장으로 끌려갔다가 생환했지만 실어증에 걸려 60년이나 침묵을 지키다 숨진 김백식 씨의 사연이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하얀 유골과 현금 4만 엔, ‘조선’ 국적이 적힌 외국인 등록증이 전부였다.
철저히 잊혀질 뻔했던 그의 삶이 한일 공동제작 뮤지컬 ‘침묵의 소리’로 부활한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뮤지컬단 연습장은 한국과 일본의 배우들이 뮤지컬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 작품은 학도병으로 필리핀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조선 청년 동진과 그를 기다리다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일본 처녀 미와의 비극적 러브스토리를 통해 미스터리로 가득 찬 김 씨의 삶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동진 역은 민영기 씨(36)가, 미와 역은 일본 배우 기사키 히나노 씨(27)가 참여했다.
“한일 간 역사에 대해 잘 알진 못해요. 하지만 이 공연을 계기로, 동진과 미와의 못다 한 사랑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양국에서 확산될 것으로 확신합니다.”(기사키 히나노)
“이 작품에 앞서 뮤지컬 ‘이순신’에서는 일본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을 맡았죠. ‘이순신’이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춰 단순한 반일감정을 넘어서려 했다면 이번 작품은 한발 나아가 일본인 역시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임을 보여줄 겁니다.”(민영기)
서울시뮤지컬단(단장 유희성)과 일본 도쿄의 긴가도 극단(대표 시나가와 요시마사)이 공동 제작하는 ‘침묵의 소리’는 음악을 통해 동진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풀어낸 ‘세러피(치유) 뮤지컬’을 표방했다. 대본, 연출, 작곡, 안무, 연기 등 전 분야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나란히 참여한 이례적 제작 과정을 거치고 있다. ‘예술을 통한 역사 현실의 치유’라는 주제 의식을 제작 과정에서도 살려보겠다는 취지다. 일본 음악극‘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작곡을 맡은 우에다 도루 씨와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의 작곡가 장소영 씨가 함께 음악을 맡아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남성 주역인 민 씨는 가창력 부문에서 대한민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뮤지컬 스타. 기사키 씨는 여성으로 이뤄진 95년 역사의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의 가극 전문배우다.
네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는 기사키 씨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재일교포 지인이 많아 한국을 워낙 좋아했기에 이번 작품에 기쁘게 참여했다”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민 씨는 “일본 배우들은 합동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일본어 대사와 가사를 모두 다 외워왔는데 기사키 씨는 메인 테마곡을 이틀 만에 한국어로 불러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기사키 씨도 “첫날 민영기 씨의 노래를 듣고 어마어마한 성량에 완전히 압도당했다”며 “이번 작품을 계기로 한일 배우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9월 한국 공연이 끝난 뒤엔 일본으로 건너가 10월 8일부터 일본 6개 도시 순회공연을 펼칠 ‘침묵의 소리’에서 한국 배우는 한국어, 일본 배우는 일본어로 대사와 노래를 소화한다. 관객의 이해를 위해 자막을 제공한다. 풀잎피리와 가야금을 함께 연주하며 국경을 뛰어넘는 영혼의 교감을 펼칠 두 사람의 한국 무대는 9월 4∼20일 세종M씨어터에서 펼쳐진다. 02-399-177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