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무료한 일상이 주된 소재
작품 모호하고 어려워도 어둡지 않아
“장르 벗어난 사유가 문학을 살찌워
공연-전시 등 섭렵하고 반영해야”
폭우가 쏟아지던 11일 오후 시인 이근화 씨(33)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도착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우산을 잃어버렸다는 그는 곤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작은 우산을 나눠 쓰고 인근 식당으로 갔다. 둘 모두 어깨가 흠뻑 젖었다.
“이런 날 쓰기 좋은 우산인데… 이렇게 뭐든 잘 잃어버려요.”
그의 말투는 조금 느리고 또박또박했다. 시인 이 씨는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를 펴냈다. 그동안 그의 시들은 “명랑하고 모호한… 경쾌한 혁명”(문학평론가 이광호)이란 평을 받으며 문단 안팎의 관심을 끌었다.
이 씨는 어떤 매체, 잡지에서 청탁을 해도 모두 응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시를 많이 쓰는 편이다.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이 씨는 “누군가 내 시에 대해 궁금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게 무작정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전 질문지를 e메일로 먼저 보내 달라고 했다. “말하는 것보단 듣는 것을 좋아한다”며 인터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데다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부끄럽고 민망해요. 일단 질문지에 맞는 답을 써본 뒤에 그대로 읽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떨기도 해요.”
이 씨의 시에는 자극적이거나 파괴적인 이미지, 어휘 등은 없다. 다루는 소재도 주로 일상적인 것들이다.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점에서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과 비슷하지만 밝고 명랑하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는 “고통이나 슬픔, 괴로움 속에서 산출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하지만 시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그 밖에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일상의 무료함과 지루함 혹은 기쁨 모두가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 같은 작품세계는 그의 생활 방식과도 연관이 있는 듯했다. 그의 시는 새롭지만 그의 생활은 지극히 고전적이었다. 또래 시인들과는 달리 속도감이나 변화, 새로운 기계 등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스펙터클한 인생은 싫다”고 말하는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 강의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살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요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싶어요. 아무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좋아하고 집안일, 요리도 좋아해요.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는 쾌감 같은 게 있어요.”
그는 “건조대에 쭉 널어놓은 빨래를 보면 즐겁지 않으냐”고 기자에게 질문하기도 했다. 이 씨는 결혼한 지 5년째. 남편은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를 낸 이현승 시인이다.
고요하고 조용한 일상에서 그는 늘 반문을 던진다. 그는 “당연한 듯이 주어진 것들 속에서 언뜻언뜻 물음표가 똑똑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며 ‘왜 그렇지?’ ‘어떻게?’ ‘정말로?’ 같은 의문을 늘 던진다고 했다. 시가 난해하다는 평가에 대해 “다양하면서도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는 늘 문학에만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시인들에겐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다른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 장르가 서로 다른 것들을 두루 섭렵하고 반영하는 게 필요하겠죠. 다른 문학 장르는 물론이고 음악이나 전시회 등에서 영향을 받기도 해요. 문학이란 장르 테두리 안에서 사유하는 방식을 벗어날 때 거꾸로 문학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더 새롭고 더 풍요로운 문학을 위해 영화, 전시회 등을 보러 다니지만 그때마다 문학은 촌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천재들은 문학보단 영화나 음악을 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촌스럽고 투박한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긴 해요.”
그는 시가 좀 촌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시를 믿는 시인이다.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순 없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단초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문제를 늘 고민하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났을 때, 비가 그쳐 있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