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대영박물관 소장품에 홀려 ‘문명의 고향’ 찾아가보니…

  • 입력 2009년 9월 5일 02시 51분


古代 유물이 살아있더라

◇문명의 산책자/이케자와 나쓰키 지음·노재명 옮김/476쪽·2만 원·산책자

‘우선 연인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대영박물관의 정면으로 들어가 그리스 구역으로 들어간다. 제9전시실의 입구가 나타난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왼쪽 무릎을 조금 앞으로 내민 모습으로 서 있다. 아아, 역시 아무 변화가 없군. 그는 안심했다.’

그는 대영박물관 마니아다. 그는 스스로를 고대(古代) 망상광이라는 의미로 ‘파레오마니아(pareomania)’라고 부른다. 대영박물관의 유물에 흠뻑 빠진 그는 급기야 유물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저자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저자는 책에서 스스로를 ‘그’로 부르며 ‘그’가 26개 유물을 따라 13개국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책에 담았다.

그리스 아테네의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카리아티드(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기둥으로 사용된 여인상)였던 제9전시실의 ‘그녀’에게 이끌려 간 곳은 그리스. 에레크테이온 신전에는 여섯 개의 카리아티드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있는 카리아티드는 모두 복제품이고 진품은 대영박물관과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어느 날 이집트 유물관에서 ‘관을 실은 장례식 배’ 모형을 발견했다. 이집트와 나일강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이집트에 도착한 그는 유람선을 타고 나일강을 항행하며 유적지를 탐방했다. 이드푸 유적을 보다가 그는 벽면에서 많은 수의 배 그림을 발견했다. 마침 그 자리에서 만난 고대 문명 전문가가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이집트에서 묘지는 대체로 강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시신은 배에 실어 강을 건너 보냈다”는 것이다.

인도 유물관의 ‘수행을 떠나는 싯다르타’는 인도 동남부 아마라바티의 불탑에 장식돼 있던 조각으로 석가모니의 생애를 표현한 것이다. 이 조각에선 석가모니의 오른쪽에 있는 풍만한 몸매의 두 여성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불교 조각에 관능적 묘사가 있는 이유를 찾아 아마라바티로 떠났다.

작은 도시 아마라바티에서 풍만한 육체의 여인은 누구였을까 유추하던 그는 엘리아데의 ‘세계 종교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출가수행을 결심한 싯다르타를 신들이 밤중에 깨워 첩들의 ‘비참한 나체’를 보여준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라바티의 조각가들은 비참한 나체 대신 풍만한 육체를 그렸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이런 유혹적인 여자들을 물리치고 수행을 떠난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아이들이 그려진 사발을 보고 풍요했던 페르시아의 옛 모습을 찾아 이란으로 갔다. 사막을 건너 도기의 산지로 유명한 카샨이라는 도시에 갔으나 현대의 카샨에는 세련된 사발이 없음을 확인했다.

북미 원주민들의 신화 속 새를 나무로 만든 ‘선더버드’ 조각에 이끌려 간 곳은 캐나다의 태평양 연안 섬 알러트베이. 그는 똑같은 조각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같은 양식의 인간과 동물 가면을 볼 수 있었다. 원주민들이 의식에 쓰던 선더버드를 19세기에 백인들이 런던으로 가져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는 한국도 방문했다. 대영박물관에서 그를 한국으로 이끈 유물은 신라의 ‘석조여래좌상’이었다. 10cm 남짓한 이 작은 불상에 이끌린 것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 때문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도착한 그는 아이 얼굴의 불상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카탈로그에도 ‘입가에 떠도는 천진난만한 미소 때문에 아이 부처라고도 불린다’라든가 ‘아이의 순수함’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었다. 박물관 직원 K 씨의 권유로 경주 남산에 오른 그는 곳곳에서 불상들과 마주쳤다. 그는 아이 얼굴을 포함한 서민적인 모습의 불상에서 일본보다 앞서 대중 깊숙이 파고든 한국 불교의 역사를 알게 됐다.

26개 유물에 얽힌 얘기를 한 권에 담다 보니 한 편 한 편의 얘기가 상세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하지만 유물을 모티브 삼아 해당 문명을 탐방하는 형식의 이야기 전개는 박물관 유물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나 이것저것 무작정 훑는 해외 기행에 비해 흥미진진하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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