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속에 구상 이미지가 살짝 포개져 있다.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붓자국이 종횡무진 오가는 캔버스에서 문인화의 여백과 철학이 감지된다.
서로 다른 세계를 혼융해 한국 특유의 표현적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해온 이강소 씨(66)의 폭넓은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가 두 곳서 열리고 있다.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과 신관(02-2287-3500)에선 회화, 입체와 사진을 선보인다. 분황사를 주제로 한 설치작업 등은 경기 파주시 예술마을 헤이리 공간 퍼플(031-956-8600)에서 전시 중이다.
갤러리 현대의 ‘이강소 1989∼2009’전의 경우 20년간 그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회고전 성격을 지닌다. 1973년 첫 개인전에서 막걸리 주점을 여는 전위적 퍼포먼스를 펼친 작가는 회화 판화 입체 비디오 퍼포먼스 등 장르를 넘나들며 쉼 없는 도전을 한 뒤 1980년대 중반 평면에 다시 집중한다.
평면이 사이버 공간만큼 자유롭고 풍요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공간임을 인식한 작가는 오리와 사슴, 배의 이미지가 담긴 무채색톤의 기존 작품과 함께 ‘becoming’ ‘emptyness’ 시리즈를 내놓았다. 근작에서 오리의 형태는 희미해지고 물살을 헤엄치기보다 고요한 명상에 빠진 것 같다. 술렁거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는 절제된 조형언어와 더 깊어진 사유가 느껴진다.
“그림 속 오리는 이미지의 묘사가 아니라 차용한 것이다. 그저 멍석을 펼쳤으니 보는 사람이 감각을 일깨워 마음대로 상상력을 펴고 즐기라는 뜻이다. 그 가벼움이 내 작업이다.”
청록색 등 은은한 색상이 보태진 것도 변화. 그는 “살아있는 이 시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림과 함께 서로에게 기대어 관계를 만드는 세라믹 입체 작품, 사람이 많이 스쳐지나간 자리와 시간이 오래 중첩된 곳을 주목한 사진도 볼 수 있다.
“기존 예술이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라면 나는 존재를 입증하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존재란 자체가 틀린 말이다. 멈춰 있어야 존재인데….”
결국 그의 모든 작업은 “삶과 세계는 늘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변화와 불안정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의 기록인 셈이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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