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찾아 갈 때는/관방제 초입 포장 친 집에 들러/국수 한 대접 하고 간다/처마 밑 비집고 들어서/틈서리 목로에 자리 잡고 앉으면/국수 한 그릇 꼬옥 먹고 잡더라만,/그냥 왔다 시며/허리춤에 묻어 온 박하사탕/몰려 든 자식들에게 물리시던 어머니,/흔흔한 미소 뒤에 갈앉힌/허기진 그 모습/원추리 새순처럼 솟아/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배고픔 대신 채우고 간다’(강대실의 ‘국수’ 전문)
전남 담양 관방제들머리 향교다리 부근엔 국숫집이 10여 개 죽 늘어서 있다. 하나같이 모두 잔치국숫집이다. 밤새 우려낸 멸치육수에 국수를 말아준다. 옛날 이곳은 대나무 제품을 사고파는 이름난 죽(竹)시장이었다. 요즘은 시민들의 쉼터로 변했다. 둑길 양쪽엔 200∼400년 늙은 나무들이 2km에 걸쳐 서 있다. 나무줄기엔 검버섯이 곳곳에 피었다. 주민들은 나무그늘 아래 대나무평상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며 쉰다. 젊은 연인들은 둑길을 거닌다. 그러다 출출하면 국수 한 그릇씩 후루룩 말아 먹는다. 꿀맛이 따로 없다.
177그루 늙은 나무들(천연기념물 제366호)은 하나하나 이름표를 달고 있다. 50%가량이 푸조나무이고, 그 다음이 느티나무, 팽나무 순이다. 벚나무, 은단풍, 개서어나무도 눈에 띈다. 1번은 딱 한 그루밖에 없는 아름드리 엄나무. 177번은 도마 만드는 데 으뜸인 팽나무.
진우네 국수집(061-381-5344)은 1번 엄나무 가까이에 있다. 진우네는 죽시장이 섰을 때부터 장꾼들 발길이 붐볐던 곳. 어머니로부터 아들(이진우 씨)까지 2대째 50년 가까이 잔치국수를 팔고 있다.
진우네 잔치국수 국물은 멸치에 청양고추, 양파, 대파, 다진 마늘 등을 넣고 15시간 이상 푹 우려낸다. 멸치내장은 진한 맛을 내기 위해 빼지 않는다. 매운 청양고추가 비린 맛을 없애준다. 이 집의 또 다른 명물은 멸치육수에 오랜 시간 푹 삶은 계란. 사람들은 ‘약계란’이라고 부른다. 흰자위에 멸치육국물이 배어 색깔이 누르스름하다. 맛도 짭조름하고 감칠맛이 있다.
진우네 국수 면발은 보통 잔치국수에 비해 퉁퉁하다. 소면보다 굵고, 우동면발보다 가늘다. 약간 물컹하지만 부드럽다. 밑반찬은 익은 김치와 김무침, 콩나물무침, 단무지무침이다. 남도 특유의 곰삭은 맛이 난다. 비빔국수도 쫄깃하고 매콤새콤하다.
잔치국수는 서민 음식이다. 소박하고 담백하다.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 값도 한 그릇에 3500원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음에 점찍듯 ‘점심용’으로는 안성맞춤이다.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잔치국수는 국물이 생명이다. 멸치내장의 쓴맛과 몸통의 비린내가 없어야 한다. 멸치를 바짝 말리거나, 살짝 볶은 뒤 국물을 내면 비린내가 줄어든다. 국물은 대부분 멸치에 다시마, 무, 대파, 바지락, 북어머리 등을 넣고 푹 우려낸다. 다시마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필수품. 멸치와 찰떡궁합이라 같이 어우러지면 감칠맛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국물은 일단 끓은 뒤엔 약한 불로 줄여야 깊은 맛이 우러난다. 면발은 펄펄 끓는 국물에 삶아낸 뒤 찬물에 헹군다. 그리고 타래로 만들어 소쿠리에서 물기를 뺀다. 국수를 너무 오래 삶으면 면발이 풀어져버린다. 언제 꺼낼지 타이밍이 중요하다.
국물 맛은 국숫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주재료가 같아도 불의 세기, 우려내는 시간, 보조재료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음식만큼 큰 차이는 아니다. 결국 멸치로 국물을 낸다는 점에서는 거의 같다. 국수에 얹는 고명도 대부분 김 가루, 유부, 부추, 들깨, 살짝 데친 숙주 등으로 엇비슷하다.
서울 명동할머니국수(02-778-2705·명동 입구 외환은행 뒤)는 멸치국수에 두부를 푸짐하게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묘한 맛이 우러난다. 두부의 구수하고 들큼한 맛이 배어난다. 일본인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요즘은 잔치국숫집도 지하철을 중심으로 체인점이 늘고 있다. 명동할머니국수집과 공릉동멸치국수(02-6080-6035)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인기 체인점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 공릉역 부근엔 아예 멸치국수골목(10여 개 국숫집)까지 들어섰다.
고대앞원조멸치국수(02-953-1095)는 대학생과 젊은 회사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 등장해 유명해진 곳이다. 밤거리를 쏘다니는 젊은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배가 출출하다. 그럴 땐 후루룩∼ 뚝딱!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국수 한 그릇 말아 먹으며 허기를 때운다. 서울 도심 광화문통 종로1가 국수생각(02-723-0217), 낙원동 무아국수(02-763-1253)도 발길이 붐빈다.
가끔 포장마차에서 혼자 국수를 말아 먹는 중년 남자들을 본다. 흰머리에 구부정한 어깨, 굵게 팬 주름살, 갈라진 손바닥…. 포장마차 잔치국수는 국물에서 뜬 맛이 난다. 깊은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물맛이 혀끝에서 겉돈다. 혼자 먹는 잔치국수 맛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
옛날 농촌에서 들일할 땐 샛밥 간식으로 잔치국수가 나왔다. 사발 가득 타래면발에, 들기름 살짝 쳐서 나온 고봉 잔치국수. 반찬은 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였지만, 모두들 왁자지껄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웠다. 논두렁 막걸리 두레국수. 멸치국수 공동체.
요즘 도시 중년 사내들은 혼자 밥을 먹는다. 분식집에서 등을 돌린 채 나무젓가락으로 면발을 들어올린다. 노란 단무지에 톱니 같은 이빨자국이 삐죽삐죽하다. 문득 목울대가 천근만근 묵직해진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먹는 일의 거룩함이여/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풀어진 뒷머리를 보라’(황지우의 ‘거룩한 식사’ 부분)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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