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항률 씨(59·세종대 교수)의 작품에는 시적 감수성과 한국적 정서가 일렁인다. ‘그림으로 쓴 시’(시인 정호승)란 평을 듣는 그의 그림과 조각을 모은 ‘내면의 응시’전이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열리고 있다.
젊은 시절 기하학적 추상과 색면 추상에 집중했던 그는 불혹을 넘겨 인물로 방향을 튼다. 처음엔 까까머리 소년, 이어 색동저고리 차림 소녀가 등장한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사촌누이와 닮은 소녀의 얼굴은 대부분 측면이고 우수가 깃들어 있다. 화가는 “정면은 1인칭, 측면은 3인칭”이라며 “추억에 잠긴 인물을 표현하기엔 3인칭이 낫다”고 말한다.
아련한 기억 속 얼굴을 불러낸 또 다른 전시가 있다.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 갤러리(02-738-7818)에서 열리는 김정선 씨(37)의 개인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을 드러내는 오래된 사진이 영감의 소재라고 말하는 화가. 그는 사진 속 인물의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해석에 관심을 둔다.
옥색 저고리 차림의 중년 여인의 평범한 얼굴에는 힘든 삶을 살아도 불평하지 않았던 마지막 세대의 초상이 겹쳐지고, 단발머리 꼬마의 소 같은 눈에선 아릿한 슬픔의 기미가 엿보인다. 이해인 수녀와 김주하 앵커의 옛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도 있다. 유명인사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의 그림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에 보편성이 녹아있음을 보여준다. 겉모습을 그리기보다 인물의 추억과 감정을 길어올려 긴 울림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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