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동학]<1>대중서사장르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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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9월 14일 02시 52분


“추리영화… 코미디… 대중문화 코드 읽어 문학의 미래 예측”
《‘대중서사장르연구회’ ‘17세기 고문서 강독회’ ‘지리산 유산기(遊山記) 강독회’…. 거대 담론보다 특정 주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천착하는 연구 소모임들이 있다. 조선 후기의 추리 서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문서 분석, 산을 좋아한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 등이 이런 연구 모임의 성과다. 우리 학계를 풍성하게 하는 작지만 큰 연구 모임의 활동을 들여다본다.》
현대-고전문학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전공자 주제별 토론
“인기 끄는 서사의 원형 분석
디지털시대 맞는 공식 찾아”

“영화 ‘추격자’를 보면 끝으로 갈수록 주인공 엄중호는 ‘일단 잡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범인을 쫓죠. 이 ‘추격의 열망’이라는 감정이 상업적 내러티브 속에서 잘 전달됐기 때문에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감정이 추리에 결합하는 건 ‘추격자’의 특징이면서 한국 추리서사의 특징 아닐까요. 일제강점기 추리소설을 보면 셜록 홈스처럼 냉철하기보다는 연애에 빠져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탐정들이 등장하잖아요.”
10일 오후 7시 서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야외 테라스. 해가 저물어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대중서사장르연구회’의 연구자 10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격주로 목요일에 모이는 이들은 78학번부터 98학번까지로 전공은 고전소설과 현대소설부터 영화, 연극에 스페인 프랑스문학까지 다양했다. 이 모임의 회원은 모두 18명. 주제에 따라 토론 참가자가 바뀌기도 한다.
이날 모임의 토론 소재는 ‘살인의 추억’ ‘추격자’ ‘마더’ 등 2000년대 한국 추리영화. 영화평론가 이현경 씨(43)가 써 온 발제문 ‘2000년 이후 한국 영화에 나타난 추리서사 양상’을 두고 토론이 이뤄졌다. 이 모임의 대표 박유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41) 등 5명은 오후 3시경 ‘목요영화회’ 모임에서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이’를 보기도 했다.
이들은 도시락을 시켜 먹으며 추리영화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주라 항공대 한국어교육원 강사(31)는 “2003년 ‘살인의 추억’이 대박을 터뜨리고 2005년 ‘혈의 누’ 등이 나오면서 추리영화의 붐이 조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배지완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45)는 “2000년대 이후는 포스트모던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시대”라며 “이성을 강조하는 기존 추리문법을 깨고 주관에 사로잡힌, 탐정답지 않은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중서사장르연구회가 처음 발족한 것은 2004년 8월. 영상 미디어가 보편화되고 텍스트로서의 문학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새로운 매체에 따라 내용도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였다. 이들은 매체가 바뀌는데도 ‘추리’ ‘멜로’ 같은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는 현상에 주목해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모임을 주도해온 박 교수는 “추리나 멜로드라마 같은 대중서사 장르를 통해 매체나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한 서사의 원형을 찾아내면 디지털 시대의 서사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게 우리 모임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조선 시대 이후 최근까지 등장한 추리물, 환상물, 멜로드라마, 역사허구물(사극 등), 코미디 등 다섯 개 장르의 대중 서사물을 정리한 뒤 대중이 좋아하는 공통된 서사의 원형이나 공식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멜로드라마와 역사허구물을 다룬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1, 2권을 2007년과 2009년에 펴냈다. 2008년 6월부터는 추리서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조선 후기 추리서사에 나타난 살인 범죄와 수사 과정의 성격’ ‘근대 도입기 추리문학 독자층의 형성과 그 취향’ 등을 다뤘다. 2010년에는 추리서사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연구 성과를 검증할 예정이다. 앞으로 코미디와 환상물을 다룬 책을 펴내 연구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대중서사장르 시리즈 5권을 완간할 계획이다.
고전과 현대, 영화와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만큼 이 연구회에서는 주제에 따라 토론자들이 자유롭게 참가한다.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추리서사를 다루는 10일 토론에는 프랑스 문학과 스페인 문학 전공자가 초빙되기도 했다.
토론도 ‘수다’로 보일 만큼 격의 없이 이뤄진다. 때때로 반말을 섞어가며 토론하고, ‘언니’ 같은 호칭이 등장할 때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연구 주제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날 주제발표를 한 이현경 씨는 “2005년 아는 선배와 ‘목요영화회’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가입을 권유받았다”며 “열심히 하면서도 서로 친구처럼 즐거운 것이 우리 모임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다음 모임에선 배지완 교수가 보르헤스의 추리소설을 강의하기로 하고 이날 모임은 마무리됐다. 배 교수가 다음에 다룰 추리소설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라고 밝히자 이들은 제목을 받아 적으며 “재미있겠다”고 탄성을 질렀다. 어느새 3시간이 훌쩍 넘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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