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맨얼굴’ 20선]<7>나의 삶, 나의 음악

  • 입력 2009년 9월 17일 02시 52분


◇나의 삶, 나의 음악/엘리제 마흐 지음/동문선

《“음악이 표현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음악이 아니라 언어만 남고 만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음악을 연주하는 이유다. 내게 그 존재를 믿는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고자 해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는 연주를 하며, 바로 이것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나 자신만의 방법이다.”(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20세기 피아노 거장 13명의 ‘고백’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릴리 크라우스는 1940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연주 여행을 갔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수용소에 갇힌 그는 매일 우물에서 물이 가득 찬 물통을 120차례나 끌어올려야 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부풀어 올라 손을 펴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피아노를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된다면 하고, 아니면 못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매일 물을 긷던 그의 손가락은 오히려 강해졌다.

크리스마스에 피아노를 징발해 온 일본군은 그에게 ‘다른 수감자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명령했다. “마치 여러 날 동안 사막에서 헤매고 다닌 사람의 눈에 수정처럼 맑은 물이 황량한 모래밭에서 솟아나는 것이 보이는 것과 같았다. 나는 고통과 즐거움이 뒤섞인 내 마음의 모든 것을 가지고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저자는 20세기의 대표 피아노 거장 13명을 인터뷰한 뒤 그 내용을 1인칭 술회 형식으로 정리했다. 인생과 음악에서의 성장 과정, 무대 위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 후배들을 위한 조언과 비밀스레 숨겨두었던 일화가 담겼다.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한여름에도 목도리를 둘렀다’는 기인적 면모를 지녔다. 그러나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실상’은 다르다. 예루살렘에서 연주회가 열리기 몇 시간 전 연주회장에 도착한 그는 실내가 섭씨 10도쯤 되고 난방시설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연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공연 직전 주최 측 사람이 무대에 올라와 청중의 양해를 구했고, 굴드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코트를 입은 채 걸어나왔다. 이것이 그의 회상이지만, 실제로 당시 상황이 그랬는지는 입증하기 어렵다.

같은 주제를 다른 두 예술가의 입으로 듣는 것도 재미를 준다. 바흐 연주로 정평이 있는 굴드는 10대 중반까지 로절린 투렉의 연주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고, 그 무렵 이미 ‘절제된 타건과 페달을 밟지 않는’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이 거의 형성되어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런데 어느 날 비슷한 연주를 듣게 된 것이다. “그래,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투렉의 바흐 연주 스타일은 하루아침에 형성됐다. 바흐 평균율을 연습하던 중이었다. “연주를 시작했고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찾았을 때 나는 바흐 작품의 구조, 그의 음악 심리, 형식 감각에 대해 나름대로의 식견을 갖게 되었다.” 발견 과정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의 바흐는 전통이 아닌 ‘직관’의 결과였던 것이다.

후배들에게 주는 조언에도 공통점이 많다. 대가들은 콩쿠르가 ‘잘 하는 사람을 육성하기보다는 실수한 사람을 떨어뜨리며’ ‘감정이 없이 타악기처럼 연주하는’ 현대의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가 콩쿠르를 보는 눈은 다르다. 그는 “콩쿠르 수상을 계기로 피아노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음악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이 경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상한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뤄진 원서 첫 권을 번역한 것이다. 원서 제2권에도 파울 바두라스코다, 에밀 길렐스, 머레이 페라이어 등 피아노 거장들의 인터뷰가 실렸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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