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 1시 서울 용산구 한강로 아이파크몰 내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 ‘월드바투리그(WBL)’ 본선 경기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프로바둑기사 이창호 9단(34)이 등장하자 환호성이 쏟아졌다. 중국 선수와의 본선을 치르기 위해 나타난 그는 헤드폰을 쓰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여기서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바둑판 앞에서 바둑을 두던 이창호가 아니었다.
선수만 다른 게 아니었다. 관중도 달랐다.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보려고 모여든 10, 20대들로 꽉 차던 이곳에 울려 퍼진 ‘굵은’ 환호성의 주인공들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30, 40대 아저씨들이었다. 이들은 직접 만든 응원카드를 꺼내들고 휴대전화 사진기로 열심히 경기 장면을 찍기도 했다. 안동명 씨(41·출판사 운영)는 “경기가 열릴 때마다 회사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참석할 정도”라며 “프로바둑기사들이 헤드폰을 끼고 게임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기원에서 혼자 바둑을 둘 때는 몰랐는데 응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 부흥기 맞은 온라인 바둑 산업
올해 처음 열린 월드바투리그는 총상금이 12억 원(회당 3억 원씩 4회)이나 걸린 경기. 하지만 출전 선수가 더 화제다. 본선에 오른 16명 중 14명이 프로바둑기사 출신으로, 한국 선수는 이창호, 박지은 9단 등 스타급 기사들을 포함해 총 8명이다. 중국 선수도 6명 모두 프로바둑기사다.
바투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라는 뜻으로 지난해 12월 게임 개발업체 ‘이플레이온’에서 만든 프로그램. 지루함을 덜기 위해 가로세로 19줄이 아니라 11줄로 바둑판을 축소시켰고 20분 안에 승패가 난다. 바둑이 치밀한 수읽기의 싸움이고 급수에 따라 우열이 가려지는 데 비해 바투는 우연성을 강조해 실력이 높더라도 100% 승리하지 않는 것이 차이점이자 매력이다. 출시한 지 8개월 만에 가입자 30만 명을 돌파하면서 기염을 토하자 e스포츠협회는 공식 종목으로 채택했다. 이플레이온은 내년을 목표로 인터넷TV(IPTV)에서 즐길 수 있는 ‘IPTV 바투’도 선보일 계획이다.
삼성전자까지 뛰어들었다. 바투를 휴대전화용 게임으로 개발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이플레이온과 같이 최근 유럽에서 문을 연 휴대전화 소프트웨어 오픈마켓 ‘삼성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스토어’에 12월경 선보일 예정이다. 국내 온라인 바둑 게임이 중국과 일본에 소규모로 수출된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한중일 3국 시장에 머물렀던 국내 온라인 바둑 산업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스포츠협회 이재형 경기국장은 “전통 바둑을 우리 손으로 현대화해 게임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국내 온라인 바둑 산업의 부흥기를 맞았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 레드오션, 그러나 지금이 기회
온라인 바둑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된 1999년부터다. 동아닷컴을 통해 인터넷 대국 서비스를 시작한 ‘네오스톤’ 같은 바둑 사이트들이 생겼고, 이후 게임 포털 사이트들이 서비스를 개시하며 널리 퍼졌다.
그러나 2006년 이후 대형 게임 포털들이 바둑 사이트들을 인수하며 서비스 유료화로 돈벌이 경쟁에 나서고 일부에선 ‘베팅’ 서비스로 ‘18세 이상 사용 가능’ 등급 판정을 받는 등 사행성 게임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바둑 인구 비율(대한민국 바둑 백서)도 2009년 20.5%(약 950만 명)로 2000년 32%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줄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바투는 국내 온라인 바둑 산업에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는 셈. 특히 중년 게임, 노쇠한 이미지로 점철됐던 온라인 바둑 업계에 젊은층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현재 바투 이용자 중 20대가 29.0%로 가장 많고 10대 이용자도 19.4%나 된다.
월드바투리그에 참가한 이창호 9단은 “고리타분한 이미지, 젊은층의 외면 등으로 갈수록 바둑이 영향력을 잃는 것 같아 염려했다”며 “바둑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이 높아지면 국내 바둑 산업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층의 유입만으로는 업계 부흥을 이끄는 전환점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시장 자체가 이미 포화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 세계 ‘빅3’인 아시아 3개국 중 중국은 바둑 인구가 2500만 명이 넘으며 양적인 성장을 기록하고 있고, 일본은 자국 바둑인 ‘고(碁)’를 유럽, 북미에 국제어로 통용시키며 질적 성장을 이룬 상황이다.
반면 우리는 세계대회를 휩쓰는 스타 기사들은 많지만 이를 산업, 문화적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기원의 자회사인 온라인 바둑 업체 ‘사이버 오로’의 정용진 이사는 “국내 바둑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선 e스포츠 산업과 온라인 정보기술(IT) 인프라를 활용해 세계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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