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적인 여성누드의 ‘진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명화 속에 여성들이 등장한다. 풍만한 몸에 매혹적인 자태의 여신들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다소 부자연스러운 포즈로 관능미를 강조한 그림 속의 여성들은 주체로 존재한다기보다는 타자의 시선이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 대상화된 존재로 비치기도 한다.
이 책은 미술이 여성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했으며 그림 속의 여성상은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을 거쳐 왔는지를 살펴본다. 주로 서양의 명화들을 인용했지만 한국 중국 등 동양의 미술작품 속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모습도 다뤘다.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화가가 그려낸 여성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벨라스케스의 ‘화장하는 비너스’다. 누드의 비너스는 ‘그림의 소유자를 유혹하며 고혹적인 자태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요염한 분위기’를 풍긴다. 큐피드는 침대 발치에서 거울을 들고 있고, 비너스는 이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마치 관람객들이 자신의 뒤태를 훔쳐보는 것을 느긋하게 확인하는 표정이다. 저자는 “거울의 존재는 여성에게 ‘보이는 여성’으로 다루어지는 사회적 통념을 묵인하고 방조하게 하는 굴레를 씌운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이 작품은 20세기 초 급진적인 여성운동가로부터 난도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여자가 직업 화가가 되는 게 사회제도상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 서양 역사상 최초의 여성화가로 기록된 인물은 17세기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그는 교습 도중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하지만 그를 고발한 뒤에도 오히려 비인간적인 고문과 처절한 심리(審理)를 겪고 난잡한 성행위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런 불행을 딛고 여성화가로 성장한 그가 그린 걸작이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뒤 죽임으로써 아시리아 군대를 쫓은 유디트는 애국의 표본으로 많은 화가가 애용했던 주제였다. 하지만 수많은 동명의 작품 중에서 카라바조의 작품만 비교해 봐도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가 차별화되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단지 예쁘기만 한 요조숙녀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순간에도 어정쩡한 자세에 이마를 찌푸려 연약함을 강조했다면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적장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쥔 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냉정한 얼굴이다. 저자는 “남성 화가들이 그린 유디트의 이야기는 ‘박해에 대한 의인의 승리’나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만을 상징했지만 이제 한 여성 화가가 남자를 응징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20세기 최고의 조각가이자 1960, 70년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입지를 굳힌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백인 남성 중심의 모더니즘이 판을 치던 시절 화단의 철저한 무관심에도 아랑곳없이 독자적 자기세계를 구축했던 이 작가는 신체나 성이 미술의 주요 담론으로 부각되면서 70세가 넘어서야 주목을 받았다. 남녀의 성을 상징하는 것들을 모두 가진 자웅동체 조각상 등을 선보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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