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귀에 익은, 하지만 불편한

  • 입력 2009년 9월 25일 02시 51분


익숙해서 편안한 이야기가 있고, 익숙해도 불편한 이야기가 있다. 서양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사건이라면 한국에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그렇다. 유대인 학살을 다룬 이야기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되풀이된다. 반면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예술작품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온다.

‘특급호텔’(연출 박정의)은 그 이유를 한 번쯤 곱씹어 보게 하는 연극이다. 지독한 반어가 담긴 제목은 실제 일본군 위안부 막사의 이름 중 하나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낯익음과 낯섦을 뒤섞은 데서 나온다. 낯익음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이 20만 명으로 추정되며 그중 70∼80%가 한국소녀들이었고 그들이 ‘용사’들을 위한 ‘공중위생변소’로 취급받았다는 차가운 사실의 재확인이다. 낯섦은 그 고통과 분노를 관찰자의 시각이 아니라 철저히 희생자의 체험으로 치환함으로써 관객이 그에 동참하도록 한 점이다.

연극은 일본군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간 4명의 소녀가 겪은 끔찍한 고통을 스스로의 입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열여덟 청상과부 옥동(이상희)은 무자비한 성폭행에 배 속의 유복자를 잃은 뒤 베개를 아기처럼 업고 다닌다. 간호사로 보낸다는 순사의 말을 믿고 끌려온 열다섯 금순(정의순)은 자신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돌덩어리를 모은다. 열한 살 선희(안꽃님)는 현실의 고통을 잊겠다는 생각으로 눈에 고춧가루를 뿌린다. 해녀였던 보배(손지원)는 두려움에 떠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낀다.

대본의 원작자가 미국에서 활동 중인 극작가 라본 뮬러라는 점도 낯섦을 가져온다. 그의 대리체험은 관객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인간 보편의 것임을 일깨운다. 영어 원문을 투사하는 무대 왼쪽의 대형스크린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또 다른 연극적 장치다. 그 장치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의 분노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02-929-641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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