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바둑 읽어주는 남자] 조훈현 9단의 시간패

  • 입력 2009년 9월 25일 17시 52분


‘영원한 바둑황제’도 가는 세월은 야속하더라.

오십 줄의 나이에도 펄펄한 노익장을 과시하며 반상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조훈현(56) 9단이 최근 시간 패를 두 번이나 당하는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시간 패란 말 그대로 주어진 대국시간을 넘겨 당하는 패배입니다. 바둑에는 초읽기란 것이 있기에 시간 패는 대부분 마지막 초읽기를 넘길 때 발생합니다. 계시원이 “마지막 초읽기입니다. 하나, 둘 … 아홉, 열!”할 때까지 착수를 못했다는 얘기지요.

초읽기의 귀신인 프로기사들로선 시간 패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입니다. 프로들은 하나에 수가 생각나더라도 여유를 부리다가(대부분 다음 수를 미리 읽어두지요) 아홉에 착수를 할 정도로 노련합니다.

조훈현 9단은 최근 삼성화재배와 스카이바둑배 시니어연승대항전에서 시간 패를 당했습니다. 박영훈 9단과 둔 삼성화재배에서는 내내 유리한 형세를 이끌다가 그야말로 황당한 ‘떡 수’를 둔 뒤 본인 스스로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시간 패를 당했고, 시니어대항전에서는 최종 주장전에서 라이벌 서봉수 9단에게 시간 패했습니다.

하나는 유리한 바둑을 졌고, 또 하나는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졌으니 두 판 모두 뼈 속이 시린 패배였을 겁니다.

젊어서부터 바둑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조차 완벽함을 과시해 온 조훈현 9단이 부끄러운 시간 패를, 그것도 두 차례나 연달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세월의 무서움이 새삼 느껴집니다.

바둑에서 체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외로 큽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체력이 떨어지면 집중력이 약해집니다. 수를 읽는 솜씨야 어디 가겠습니까마는 정교함과 처리능력이 떨어지지요.

젊어서 1분이면 보던 수를 나이가 들면 5분, 10분씩 걸리게 됩니다.

사실 감각과 속기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을 자랑했던 젊은 시절의 조훈현 9단에게 시간 패란 ‘농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5분씩 걸려 읽는 수를 30초 만에 뚝딱 읽고 두어 버리니 시간 패는커녕 시간이 남아돌 지경이었으니까요. 남는 시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었다면 조9단은 일찌감치 큰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저도 마흔이 넘어가면서 슬슬 깜빡증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번 주 바둑은 이걸 써야지’하고 생각해 놨다가도 막상 마감이 다가오면 ‘그게 뭐였지? 큰일 났다’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조훈현 9단의 뜬금없는 시간 패 소식을 들으니 어쩐지 남 얘기 할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데스크 부장이 “당신, 시간 패야!”하기 전에 담배 끊고 아침 등산이라도 시작해야겠습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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