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물끄러미 보다, 죽음 앞의 나를

  • 입력 2009년 9월 26일 02시 56분


◇내면기행/심경호 지음·612쪽/2만3000원·이가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삶에 대한 자문(自問)은 힘이 세다. 무의식 속 저 깊은 곳에 침잠해 있던 물음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바쁜 일상을 비집고 의식 위로 부상해 삶을 흔들곤 한다. 이 질문의 역사는 오래됐다.

우리보다 앞서 산 지식인들은 묘비명을 스스로 지으며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하려 했다. 》

선인들이 스스로 지은 묘비명
“평생을 낭비하다니” 후회
“나를 낮추고 멈췄다” 자족
인생에 대한 사색-통찰 담겨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1200∼1900년대 지식인들이 남긴 자만(自輓·스스로의 죽음을 사색하며 지은 글)과 자명(自銘·자신의 무덤에 묻거나 무덤 앞에 세울 비명을 미리 지은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자신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 단지 그 시대 그들만의 이야기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 허물을 줄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목은 86세 때 130글자의 자명비에서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는 일생 동안 인간사의 현실에서 유학의 이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으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 애썼지만 돌아보면 어느 하나도 뜻에 맞는 것이 없었다는 자탄이다.

임원경제지의 편찬자인 서유구는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낭비일 뿐인가”라고 했다. 저술활동이나 교육 관계를 보더라도 결코 낭비라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는데도 죽음 앞에서는 자기 인생을 낮춘 것이다. 저자는 “독방에 갇힌 빠삐용이 상상 속의 법정에서 ‘살인죄는 부인하지만 인생을 낭비한 죄를 인정해 스스로 유죄’라고 하듯 인생을 낭비한 죄가 없다고 자신할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

선인들이 스스로 자명을 남긴 것은 죽은 뒤의 잘못된 평가를 막고 스스로의 일생을 개괄해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퇴계 이황은 이런 글은 개인의 독백에 그치지 않고 영구히 전하여 객관적 비평의 자료가 될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벼슬을 자꾸 내려 어쩔 수 없이 벼슬을 살아야 했다”고 썼다. “시름 가운데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라는 지혜도 담았다. 저자는 “시름은 우국(憂國)의 시름이요, 즐거움은 요산요수의 즐거움”이라며 “인생에서 그 둘은 모순이 아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삶에 만족한다는 글을 남긴 선인도 적지 않다. 조선의 명문장가였던 남유용은 140자 안팎의 자명에서 “마음을 망령되이 쓰지 않았고 발로는 아무데나 가지 않았으며 사물을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고 그칠 데서 그칠 줄 알았기 때문에 험한 길을 갔으되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적었다.

○ “죽음에 대한 사색은 곧 삶에 대한 사색”

저자는 선인들이 죽음에 대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했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서문에 적은 죽음에 대한 글은 삶에 대한 태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나의 가장 외부에 있으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완결시키는 것이 나의 죽음이다. 죽음 뒤에 나는 모욕도 칭송도 들을 길 없이 그저 흙으로 돌아가고, 서서히 나의 존재는 잊히고 말 것이다. 어쩌면 죽음 자체는 내 외부의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죽음에 의해 일단 완결된 내 존재의 의미를 내가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그 점이 두렵다.”

저자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독자를 향해 ‘새벽하늘을 보면서 가슴속이 문득 저며오는 것을 느끼는 분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고 서문 말미에 적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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