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스페인, 천연두로 잉카제국을 정복하다

  • 입력 2009년 9월 26일 02시 56분


◇전염병과 역사/셸던 와츠 지음·태경섭, 한창호 옮김/584쪽·2만7000원·모티브북

지구촌 유행했던 7개 전염병
인류역사의 큰 물줄기 돌려놔
“의학은 백인들의 지배도구”

14세기 중엽 유럽에서 대유행한 페스트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상류층 사람이더라도 좋지 않은 때에, 좋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면 유랑민처럼 병에 걸려 죽기 십상이었다. 페스트에 한 번 걸렸다가 회복된 사람일지라도 다시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병에 대한 공포와 함께 광기가 확산됐다. 기독교인들은 페스트를 ‘하느님이 내린 천벌’로 여겼다. 이교도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면서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1349년 스트라스부르에선 유대인 900명을 산 채로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페스트 희생자가 발생한 모든 가구를 폐쇄하도록 했다. 밀라노의 독재자 베르나르도 비스콘티는 1374년 밀라노 남쪽 도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하자 군대를 동원해 도시 전체를 봉쇄했다.

미국역사협회 회원인 저자는 범지구적 질병과 의학을 연구해온 학자다. 그는 책에서 페스트, 한센병, 천연두, 매독, 콜레라, 황열병, 말라리아 등 지난 6세기 동안 지구촌에 유행했던 7개의 전염병을 다뤘다. 전염병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염병을 둘러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제국주의의 확산을 고찰했다. 저자는 전염병이 인류 역사의 큰 물줄기를 돌려놓은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유럽인이 발을 들여놓기 전 아메리카 신대륙에는 천연두의 병원균이 없었다. 원주민들은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스페인이 멕시코 지역 아스테카를 침략한 1519년에서 1521년 사이 천연두는 아스테카를 황폐화했다. 잉카제국에선 1524∼1525년에 천연두로 지도자인 후아이나 카팍을 포함해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상시였다면 스페인 정복자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천연두의 일격을 받은 잉카 군대의 전투력은 급감했다.

저자는 “천연두가 아프리카 흑인 노예 제도를 유발했다”고 설명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병에 걸려 수없이 죽어 나가자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을 대거 데려와 노예로 부렸다는 것이다.

매독은 ‘은밀한 전염병’으로 불렸다. 500년 이상 유럽에 유행하면서도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실제 매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지만 사망자의 가족들은 정부의 조사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협박해 사망 원인을 다르게 기록하도록 했다.

영국은 제국주의적 확장을 벌이다 전염병의 역습을 당하기도 했다. 1817년 인도에서 등장한 콜레라가 1831년 영국에 상륙했다. 이후 영국은 19세기에만 다섯 차례의 유행성 콜레라가 돌아 약 1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저자는 서양에서 의료체계가 제대로 확립하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가 유럽의 제국주의가 번창하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차지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열대 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태동했다. 열대 의학은 정복의 최초 단계부터 세계 모든 지역에 ‘백인종’의 정착을 가능하게 한 제국주의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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